나의 삶/나의 생각
희년
지오마린 GeoMarine
2025. 7. 9. 10:16
[펌]
<‘희년’의 부채탕감 필요성을 역설하는 이재명 대통령, 희년에 무관심한 교회>
1. 지난 7월 4일 대전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놀라운, 가슴 뛰는 발언을 했다.
대통령은 장기 채무로 고통받는 서민들이 겪는 괴로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현실감있게 설명하며 “7년 이상 된 빚은 탕감하는 것이 옳다.” “과거 실수로 생긴 빚의 족쇄를 대물림하는 사회는 정의롭지 않다.”고 주장하고 이것의 근거를 “50년마다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노예를 해방”하는 희년(Jubilee)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오늘 자신이 "얘기하고 싶은 진짜는 이 얘기", 즉 희년 부채탕감이라고.
대통령은 장기 채무로 고통받는 서민들이 겪는 괴로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현실감있게 설명하며 “7년 이상 된 빚은 탕감하는 것이 옳다.” “과거 실수로 생긴 빚의 족쇄를 대물림하는 사회는 정의롭지 않다.”고 주장하고 이것의 근거를 “50년마다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노예를 해방”하는 희년(Jubilee)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오늘 자신이 "얘기하고 싶은 진짜는 이 얘기", 즉 희년 부채탕감이라고.
2. 기독인인 나는 깜짝 놀랐다.
희년 실현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다니. 지금껏 이런 정치인이 있었는가. 더구나 그는 대통령이다.
물론 희년에는 부채탕감만 있었던 건 아니다.
7일에 하루씩 집에서 일하는 종뿐만 아니라 가축도 쉬도록 하는 안식일, 7년에 한 번씩 부채를 완전히 탕감해주고 노예를 완전히 해방하되 해방할 때는 먹을 걸 충분히 줘서 보내야 하며 휴경해서 땅도 쉬게 하는 안식년(면제년), 그리고 안식년이 7번 지난 다음 해, 그러니까 50년째 되는 해에 땅과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땅과 집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회복하는 이 모든 것을 희년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과 모든 피조물의 회복이 바로 희년이다. 더 놀라운 건 예수님이 이 희년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희년 실현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다니. 지금껏 이런 정치인이 있었는가. 더구나 그는 대통령이다.
물론 희년에는 부채탕감만 있었던 건 아니다.
7일에 하루씩 집에서 일하는 종뿐만 아니라 가축도 쉬도록 하는 안식일, 7년에 한 번씩 부채를 완전히 탕감해주고 노예를 완전히 해방하되 해방할 때는 먹을 걸 충분히 줘서 보내야 하며 휴경해서 땅도 쉬게 하는 안식년(면제년), 그리고 안식년이 7번 지난 다음 해, 그러니까 50년째 되는 해에 땅과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땅과 집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회복하는 이 모든 것을 희년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과 모든 피조물의 회복이 바로 희년이다. 더 놀라운 건 예수님이 이 희년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3. 그러나 교회는 대통령의 이 놀라운 발언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 다니고 성서를 여러 번 읽어도 희년이 성서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교인이 태반이다.
율법과 예언자를 완성하로 오신 예수님이 희년(은혜의 해)을 선포하셨다는 것에도 주목하지 않는다.
또다른 한편 희년을 아는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희년은 이스라엘과 교회사에서 지킨 적도 실현된 적도 없는, 그런 까닭에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이렇게 오늘날 교회에서 희년은 철저히 외면 받고 관념화되어 있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 다니고 성서를 여러 번 읽어도 희년이 성서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교인이 태반이다.
율법과 예언자를 완성하로 오신 예수님이 희년(은혜의 해)을 선포하셨다는 것에도 주목하지 않는다.
또다른 한편 희년을 아는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희년은 이스라엘과 교회사에서 지킨 적도 실현된 적도 없는, 그런 까닭에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이렇게 오늘날 교회에서 희년은 철저히 외면 받고 관념화되어 있다.
4. 그러나 희년을 모르면 성서가 말하는 거룩한 나라,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희년을 중심에 놓지 않으면 이스라엘 역사를 해석할 수 없다고, 이스라엘이 멸망한 진짜 이유를 모르는 것이라고 감히 주장한다.―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국력이 부족해서 망한 게 아니라는 것이 예언자들의 공통된 역사 해석이다.― 그리고 희년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정말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면 주기도문은 “나라가 임하시오며”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희년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을 암송만 하고 하나님이 이루어주시겠지 하며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현실 속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사도들에게 배웠던 초기 교회 성도들은 성령이 임한 후에 희년의 정신을 무려 300년 가까이 실천에 옮겼고, 그래서 기독인을 포함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것이 로마를 변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요한계시록은 말한다.
희년을 중심에 놓지 않으면 이스라엘 역사를 해석할 수 없다고, 이스라엘이 멸망한 진짜 이유를 모르는 것이라고 감히 주장한다.―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국력이 부족해서 망한 게 아니라는 것이 예언자들의 공통된 역사 해석이다.― 그리고 희년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정말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면 주기도문은 “나라가 임하시오며”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희년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을 암송만 하고 하나님이 이루어주시겠지 하며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현실 속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사도들에게 배웠던 초기 교회 성도들은 성령이 임한 후에 희년의 정신을 무려 300년 가까이 실천에 옮겼고, 그래서 기독인을 포함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것이 로마를 변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요한계시록은 말한다.
5. 지금 한국의 주류 교회는, 다수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온건한 이재명 정부를 좌파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부로 규정·매도하고 있다.
신앙이 열심인 교인일수록 이런 인식에 절어 있다.
참으로 절망스럽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그들은 “사회주의는 기독교를 박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을 신봉한다,
그러니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반대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고 핏대를 올리며 자신의 신앙적 순수성을 강변한다.
신앙이 열심인 교인일수록 이런 인식에 절어 있다.
참으로 절망스럽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그들은 “사회주의는 기독교를 박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을 신봉한다,
그러니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반대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고 핏대를 올리며 자신의 신앙적 순수성을 강변한다.
6. 그러나 이것은 예언자와 예수님의 역사해석과는 거리가 멀어도 보통 먼 것이 아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기독교에 적대적이고 때론 박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기독교에 적대적인 까닭이 무신론을 신봉해서가 아니다.
그건 역사 속에서 중세와 근대에 등장한 기독교가, 성서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를 보여주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고사하고 혁파해야 할 불의한 기득권 체제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옹호해 왔기 때문이다.
중세와 근대의 기독교를 보라. 중세 기독교는 중세가 ‘농노(農奴)’ 기반 경제였고 철저한 신분제였음에도 착취자인 영주의 편에 섰고,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근대 국가의 식민지 수탈과 ‘공노(工奴)’를 구조적으로 양산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엔 둔감하고 착취자인 자본가와 제국주의 국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온 것이 사실 아닌가.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꺾어 놓았다.
그러므로 구약 예언자의 역사 해석에 따르면 이런 기독교에 대한 사회주의 탄압은 희년 실현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불의에 눈감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열렬히 지지·흠모하고 희년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 교회의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해야 하지 않나?
‘배교→징계→회개→구원’이라는 도식으로 역사를 해석한 구약의 사사기는, 그리고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세례요한과 사도요한은 지금의 교회에게 말한다. 회개하라고.
물론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기독교에 적대적이고 때론 박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기독교에 적대적인 까닭이 무신론을 신봉해서가 아니다.
그건 역사 속에서 중세와 근대에 등장한 기독교가, 성서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를 보여주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고사하고 혁파해야 할 불의한 기득권 체제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옹호해 왔기 때문이다.
중세와 근대의 기독교를 보라. 중세 기독교는 중세가 ‘농노(農奴)’ 기반 경제였고 철저한 신분제였음에도 착취자인 영주의 편에 섰고,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근대 국가의 식민지 수탈과 ‘공노(工奴)’를 구조적으로 양산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엔 둔감하고 착취자인 자본가와 제국주의 국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온 것이 사실 아닌가.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꺾어 놓았다.
그러므로 구약 예언자의 역사 해석에 따르면 이런 기독교에 대한 사회주의 탄압은 희년 실현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불의에 눈감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열렬히 지지·흠모하고 희년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 교회의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해야 하지 않나?
‘배교→징계→회개→구원’이라는 도식으로 역사를 해석한 구약의 사사기는, 그리고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세례요한과 사도요한은 지금의 교회에게 말한다. 회개하라고.
7.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회개해야 하나?
회개하려면 희년이라는 거울 앞에 서야 한다.
희년이라는 거울로 교회를 비춰보면 추악한 실체가 드러난다.
다른 사람이야 죽든 말든 나 혼자, 내 가족만 편하게 근심 없이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죄라는 걸 알게 된다.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과 거짓의 달인 이명박과 정부 수립 이후 가장 포악하고 가장 파렴치한 윤석열을 지지한 것이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죄임을 깨닫게 된다.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빠져 죽든 말든, 이태원에서 청년들이 깔려 죽든 말든 일절 마음을 쓰지 않은 게 사회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명백한 죄임을 자백하게 된다.
집 없는 사람의 고통은 외면하고 내 집값만 올라가면 된다는 생각이 죄임을 알게 된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북한의 ‘북(北)’자만 들어도, 공산주의의 ‘공(共)’자만 들어도 이성을 잃고 광분하며, 불의한 기득권을 결사적으로 옹호하면서 상대적으로 상식적인 정부나 정당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공격한 것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끔찍한 죄임을 알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노예로 살아가고 지구가 불타고 있는 이 현실에 무감한 것도 죄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 희년 앞에 서야 배교한 교회의 실체가 드러난다.(이런 맘으로 나는 2019년에 다른 분들과 함께《희년》(홍성사, 2019, 공저)를 발간했다.)
회개하려면 희년이라는 거울 앞에 서야 한다.
희년이라는 거울로 교회를 비춰보면 추악한 실체가 드러난다.
다른 사람이야 죽든 말든 나 혼자, 내 가족만 편하게 근심 없이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죄라는 걸 알게 된다.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과 거짓의 달인 이명박과 정부 수립 이후 가장 포악하고 가장 파렴치한 윤석열을 지지한 것이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죄임을 깨닫게 된다.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빠져 죽든 말든, 이태원에서 청년들이 깔려 죽든 말든 일절 마음을 쓰지 않은 게 사회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명백한 죄임을 자백하게 된다.
집 없는 사람의 고통은 외면하고 내 집값만 올라가면 된다는 생각이 죄임을 알게 된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북한의 ‘북(北)’자만 들어도, 공산주의의 ‘공(共)’자만 들어도 이성을 잃고 광분하며, 불의한 기득권을 결사적으로 옹호하면서 상대적으로 상식적인 정부나 정당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공격한 것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끔찍한 죄임을 알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노예로 살아가고 지구가 불타고 있는 이 현실에 무감한 것도 죄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 희년 앞에 서야 배교한 교회의 실체가 드러난다.(이런 맘으로 나는 2019년에 다른 분들과 함께《희년》(홍성사, 2019, 공저)를 발간했다.)
8. 이재명 대통령이 말한 부채탕감은 희년의 일부이다.
그런데 일부만 언급해도 감동이 인다.
우리의 맑은 양심은 대통령의 말이 옳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노예로 전락한 현실과 땅과 집 문제 때문에 청년들과 세입자들이 당하는 고통과 생태환경의 탄식 소리에 제도적으로 응답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나는 성서가 말하는 희년이 기독인에게만 기쁜 소식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희년은 인류 전체에게 희망이요 비전이다.
그래서 나는 희년으로 요약되는 성서의 하나님 나라 진리는 기독교인에게만 진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고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부만 언급해도 감동이 인다.
우리의 맑은 양심은 대통령의 말이 옳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노예로 전락한 현실과 땅과 집 문제 때문에 청년들과 세입자들이 당하는 고통과 생태환경의 탄식 소리에 제도적으로 응답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나는 성서가 말하는 희년이 기독인에게만 기쁜 소식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희년은 인류 전체에게 희망이요 비전이다.
그래서 나는 희년으로 요약되는 성서의 하나님 나라 진리는 기독교인에게만 진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고 진리라고 생각한다.
9. 대통령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희년을 입에 올리고 부채탕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기독인/비기독인 할 것 없이 양심 있는 모든 시민들이 감동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무관심하다. 중병에 걸렸다는 증거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교회개혁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기독인/비기독인 할 것 없이 양심 있는 모든 시민들이 감동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무관심하다. 중병에 걸렸다는 증거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교회개혁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