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수원 화성의 건립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긴 것은 큰 뜻을 펴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충성스러운 신하, 군사력, 그리고 이들을 원만하게 다룰 수 있는 자금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필요했다. 정조는 수도인 서울에서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얻기 어려우며, 신도시를 건설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 목적의 정치 공간을 아버지의 추모 사업과 연결하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수원부는 딱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서울과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 활동을 위한 도시인 한편,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자신의 야망을 구현시킬 대역사를 당시 30세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에게 맡겼다. 처음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됐다. 1796년 10월, 단 34개월(중간의 6개월 정역(停役)을 생각하면 28개월)만에 낙성연을 치렀는데 수원 화성과 같이 방대한 공사를 2년 반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실학자인 정약용과 같은 젊은 피를 수혈하여 종전과 차원이 다른 계획에 따라 건설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