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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를 원룸에 살면서 월세로 소비한 돈이 몇천만원 정도 된다.
내가 이십대 내내 살았던 지역은 서울에서 다소 변방에 위치한, 학교 앞의 꽤 오래된 골목 같은 곳들이었는데, 대부분 한달에 40-50만원 정도의 월세를 받았다.
그러면 침대 하나에 책상 하나를 놓고, 이따금 바닥에 상 하나를 펼쳐 놓을 수 있는 공간 정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나마 그런 공간조차도 없는 고시원이나 하숙방도 있었으니, 나 정도면 제법 나쁘지 않은 이십대 자취 생활을 한 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알게 된 것인데, 만약에 어느 정도 고정적인 소득이 있는 직장이라면, 한달에 40-50만원 정도의 이자를 내고 2억 정도의 전세자금 대출도 가능하며, 그러면 같은 돈을 들이더라도 훨씬 더 나은 환경과 더 넓은 집에서 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고정적인 소득이 없는 대학생은 같은 돈을 내더라도 침대 하나 놓으면 가득 차는 원룸에 살아야 하고, 소득이 있는 직장인은 같은 돈을 내고도 그보다 몇배 더 크고 방이 여러개 딸린 빌라나 아파트에 살 수도 있다.
이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참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돈은 가난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에게 그 가치가 전혀 다르다.
가난한 자에게 월 50만원은 식비 기타 생활비를 다 합친 돈보다 큰 돈이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 월 50만원은 전체 소득의 일부에 불과하여 생활에 큰 타격 없이 감수할 만한 돈이다.
그럼에도 가난한 자가 그렇게 엄청난 출혈을 하더라도, 그가 얻을 수 있는 건 같은 돈으로도, 꽤나 형편없는 무엇이 되어버린다.
반면, 소득도, 사회적 지위도 갖춘 자는 오히려 훨씬 저이자로 대출을 받거나 투자를 하는 식으로 같은 돈으로도 더 큰 혜택이나 이익 같은 것을 누리며 살게 된다.
지난 2-3년간 서울의 아파트값은 2-3억이 올랐고, 강남의 아파트는 5억 가량이 올랐다고 한다. 반면, 월세나 전세도 올랐다.
그러니까 애초에 몇 억 혹은 몇 십억의 자산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아파트 관리비랑 약간의 세금만 내면서, 몇 억원을 벌었다.
아마 그들이 낸 관리비나 세금은 대학교 앞 대학생이 원룸에 내던 월세나, 전세자금 대출을 받은 신혼부부가 낸 이자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게 비슷한 돈을 지불했음에도, 누군가에게 그것은 엄청난 타격이 되었고, 손실이 된 반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이득이 되었고, 정확히 그렇게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이건 단순히 노력이나 재치, 똑똑함이나 현명함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스스로를 자책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때 나도 아파트를 샀어야 하는건데, 내가 멍청했다, 바보 같았다,
누구는 똑똑해서 진즉에 아파트를 사서 벌써 1억을 벌었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이것은 똑똑함과 멍청함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은 나름대로 삶에서 신중한 선택을 통하여 주거라든지 미래라든지 직업이라든지 하는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결정한다.
이런 사태 속에 인간이 놓이게 된 것은, 스스로의 방심, 멍청함, 실수, 현명하지 못함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심할 정도로 잘못되었고 사회가 거의 미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중년이 되어서도 아직 전세집을 전전하거나 지방의 작은 빌라 하나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삶을 멍청하거나, 덜 노력하면서, 덜 현명하게 살았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그 중에는 정말 성실히 학생들을 가르쳐 온 교사도 있고, 평생 주말 없이 일해온 자영업자도 있고, 공무원이나 회사원도 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그저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살지만, 요즘 들어서는 자기 삶이 통째로 잘못된 것 같다는 박탈감을 이기기 어렵다고 한다.
자신은 평생 모은 돈으로 산 2억짜리 빌라 하나 있을 뿐인데, 누군가는 단지 사는 곳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가 평생 모은 돈을 훨씬 압도하는 돈을 그저 앉아서 벌었다는 게 삶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전해들었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지고, 오늘의 행복을 찾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고자 애쓴다지만, 그를 위해서도 얼마나 심한 박탈감과 매일 맞서써워야만 하는지는 알 사람만 알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뒤늦게 자신을 자책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이라도 늦지 않게 부동산을 꿈꾸고 있다. 혹은 그런 최소한의 목돈도 없는 사람들은 주식을, 코인을, 하다못해 유튜브 대박이나 로또라도 꿈꾸고 있다.
주위에서 정말 착실한 노력으로 차근차근 돈을 모아서 꾸준한 성실함으로 성공한 사람들 보다는, 우연히 잘 고른 집 한 채나 주식 종목 하나로 얼굴에 화색이 도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세상은 기이한 도박판이 되고 있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던 우연이 춤추는, 조커가 계단을 내려오며 덩실거리며 바라보았던 세상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기이한 열광으로 가득찬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이르게 될지도 역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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