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지승룡 facebook 2025.05.07
나는 정치인 사진을 찍을 때,
해외 브랜드 로고가 보이는 옷이나 넥타이는 절대 하지 말라고 한다.
시계도 모두 벗으라고 한다.
외제차를 타고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바꾸시라고 조언 드린다.
그걸 겉치레라고?
정치는 겉치레에서 시작된다.
선거는 ‘속내’를 판단할 기회가 없을 때,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겉모습은 의외로 솔직하고 정확하다.
표를 얻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그래서 나는 정치판에 뛰어든 분들께
"아마추어의 자세론 안 된다"고 조언 드린다.
한덕수 후보가 대선 출마 후 첫 공식 행보에서
쪽방촌을 방문했는데
그 때 입은 옷이, 일본 브랜드 데상트였다.
그 로고는 심지어 아래로 향해 있다.
떨어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는 전문가의 영역이다.
특히 선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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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jeon gh Facebook
한덕수 후보는 대선 출마선언을 하고 첫 방문지로 종로3가 쪽방촌을 찾았다. ‘약자와의 동행’이 핵심 공약이 취지였다고 한다.
그의 종삼 쪽방촌 방문은 8분이었고 그것도 쪽방촌 주민들과 대화도 없이 쪽방촌 집들 방문도 없이 기자들과의 문답을 하고 돌아갔다.
한 후보의 방문 후 쪽방촌 주민들의 반응은 다수가 불쾌함이었다. 언론의 반응도 부정적이었다.
내가 한 후보 선거참모였다면 최소한 2박3일 쪽방에서 잠을 자면서 어려운 분들과 함께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담자고 조언을 했을 것이다.
박원순 시장을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시장직에 있을 때 한 여름 에어컨 없는 삼양동에서 두 달을 살았기 때문이다.
정치가가 보여주는 것이 진정성이 있으면 좋지만 최소한 진정성이 시민들에게 인식되어야 성공하는 정치인이 되기 때문이다.
한덕수 후보가 쪽방촌을 방문한 5월 2일 나는 그의 일정을 몰랐고 민토 팝업매장 운영으로 길 위의 인문학을 쉬고 있다가 첫 탐구 일정으로 종삼 쪽방촌을 찾았다. 그리고 3일4일5일 낮과 밤 쪽방촌을 방문했고 이곳에 대하여 쓴 르포 기사를 수십 편을 읽었다.
역사인문학도로 글을 정리해두었다. 일개 시민도 이렇게 기억해야 할 민생현장을 탐구하는데 총리를 두 번이나 했고 약자와의 동행을 위해 대선에 출마를 했다고 한다면 나보다 더 깊어야 하지 않을까?
저들은 이재명 후보를 이겨야 나라가 잘되고 반명이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는다고 했다면 이미 과반수 이상의 여론조사가 나오는 이 후보보다 더 탁월해야 하지 않을까?
그의 나이가 1949년생이고 경력은 화려하지만 한덕수를 보면 구상유취함이 보일 뿐이다.
돈의동종삼 쪽방촌
종로3가역 3번출구로 나와 초동교회 근차 천여 평에 84채 허름한 2층 건물이 있고 그 안에는 1평 정도의 730여개의 쪽방이 있다. 도시 빈민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현재 오백여명 정도 1인가구로 있다.
조선시대 궁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민가였던 이곳은 식민지시절에는 상인들이 살았고 전국보부상이 모여 일정기간 지내는 여관이기도 했다.
해방이후 미군에 의한 윤락업소가 하나 둘 생겼고 6.25 동란이후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부녀자들이 생존을 위해 한국 최대의 집창촌을 형성했다. 종삼이란 곳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천 명 가까운 여성들이 성매매를 했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였다.
에피소드
박통의 경제개발은 농사로 살 수 없고 고향에서만 살 수 없게 했고 사람들은 서울로 모였다. 주택시설이 부족한 가운데 몰려드는 인구로 서울은 기형적으로 변형되었고 자본주의가 밀려오는 상권이나 육의전이나 시전을 끼고 발달한 종삼은 자본주의의 더러운 꽃 향락의 집결지가 되었다.
이렇게 몰려든 서울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낀 박정희는 부산시장 김현옥을 서울시장으로 불러들어 민중생존권을 과감하게 파괴하고 ‘건축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미션을 주었다.
돌격이 당시 서울시 구호였다. 충견 김현옥 시장은 무자비하고 신속하게 민중들의 삶을 파괴했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 세운상가였다. 1968년 9월26일 세운상가 공사 감독을 나온 김현옥이 종묘 쪽 길을 걷는데 한 여인이 다가와 “아저씨 쉬었다 가자!” 라고 손을 잡자 김현옥은 당일 종로구청에 들어가 구청장과 종로서장에게 <나비작전> 특명을 내려 한 달 안에 종삼 집창촌 철거 명령을 내린다.
나비란 윤락촌을 찾는 남자들의 은어다. 결과는 10월5일 작전개시 9일 만에 완전 철거되었다. 250가구 매춘여성 1500명은 해제되었다, 이곳을 기반으로 살고 있는 이들은 미아리로 이전했다. 땅 값은 오르고 지주들은 돈을 벌었다. 남아있는 그 윤락촌 주택은 일세를 받는 저 소득자들의 주거지가 되었다.
가옥구조는 집창촌 시절 1층에 여자들이 남자들과 수다를 떨다가 좁은 계단 2층에 4개 정도의 한 평의 방들이 남자 손님들을 받았던 가옥이다.
지금은 65세 이상 시니어 일인가구가 다수이며 일용직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데 한 달 월세가 이십여 만원이지만 여러 혜택들이 있고 돈을 모아 영구임대주택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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