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왕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용인(用人) 능력이고, 신하가 갖춰야 할 자질은 용사(用事)이다. 군왕은 자질구레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잘 골라 쓰면 된다.
신하는 맡은 일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구한말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가장 고심한 것도 사람을 판별하는 일이었다. 매일처럼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 밀려드는 사람들 가운데 옥석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때 대원군이 고용한 책사가 박유붕(朴有鵬)이라는 인물이었다.
박유붕의 주특기는 바로 지인지감(知人之鑑)이었다. 관상의 대가였다.
대원군 옆에 앉아서 내방객들의 얼굴과 행동거지를 보고, 그 성격과 주특기를 판별해주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박유붕의 내력을 추적해 보니까, 그는 경북 청도가 고향이었다. 박유붕이 관상에 일가견을 갖게 된 계기는 처갓집의 내력이 작용하였다.
장가를 '만경 두씨(萬頃 杜氏)' 집안으로 갔는데, 이 처갓집이 임진왜란 때에 이여송의 참모로 따라왔다가 조선에 눌러 앉았던 중국 도사 두사충(杜思忠)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처가에 전해 내려오던 두사충의 풍수서와 관상서를 박유붕이 입수할 수 있었고, 이 공부가 어느 정도 끝나자 서울 운현궁으로 올라갔다.
운현궁 마당에서 제기를 차며 놀고 있었던 명복(命福) 도련님의 관상을 보고, 앞으로 왕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 예언이 들어맞았다.
명복 도련님이 고종으로 등극할 무렵부터 대원군은 박유붕이 다른 데에 가지 못하도록 운현궁에다가 붙들어 놓았다.
이때부터 세간에는 일명 '백운학'으로 알려지게 된 인물이 바로 박유붕이었다.
말하자면 원조 백운학이 청도사람 박유붕이다.
대원군은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복채(福債)로 서울 '삼선교'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구역을 박유붕에게 떼어 주었다.
그가 살았던 45칸 집은 운현궁 길 건너편에 있었다.
현 '수운회관' 뒤였다.
어느날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며느릿감으로 데려왔다.
명성황후의 얼굴을 본 유붕은 반대하였다.
한 번 반대하고, 두 번 반대하고, 세 번째 반대를 하니까, 대원군이 "내 며느리를 보는 것이지, 당신 며느리 보나?" 하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후손인 박이수(朴二洙·73)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 일을 계기로 대원군과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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