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여행·Travel

20081102-사우디아라비아-두바이-이란

지오마린 GeoMarine 2008. 12. 2. 17:47

사우디아라비아, UAE, 이란 출장

장기간 2008년 11월 02일부터 11월 10일 까지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의 젯다(Jeddah)시에 있는 Musk Lake의 수질개선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 알려진 것은 09월에 우연치 않은 기회였다.

자료라고는 호수의 이름뿐이라 제안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구글(Google)에서 자료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구글에서 Musk Lake에 대한 지역신문 기사와 지도, 사진들을 취합하여 기본 자료를 정리한 뒤 크게 4가지의 문제점을 요약할 수 있었다.

호수를 막고 있는 제방이 모래로 축조 된 것이라 우기 시에 제방 붕괴가 자주 있었고, 이를 복구하는 과정도 인근에서 모래를 가져와 쌓는 방식으로 축조 되어 제방은 항상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과 호수의 바닥에서 일부가 누출이 되고 일부 호수 저면에서는 지하수가 용출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사항과 함께 호수의 수질을 오염시키는 가장 주요인은 젯다시에서 발생되는 오수를 6cu.m정도를 실은 트럭이 하루에 800대정도가 호수 상류에다 버린다는 것이다.

하루에 호수로 유입되는 오수는 약 5,000cu.m정도로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호수의 수질 문제를 해결하는 대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한 후 호수수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가설을 설정 했다.

먼저 오수의 유입을 완전 차단한다는 것과 우기시 인근 유역에서 유입되는 빗물 또한 큰 오염원은 없다고 하지만 젯다 지역의 연중 강우량은 약 250mm정도로 일반적으로 2월과 3월의 초봄에 집중적으로 내리기 때문에 이때 내리는 집중 호우는 인근 지역의 오염원을 호수로 유입 시키는 원인으로 판단된다.

이 또한 호수로 직접 유입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으로 설정 하였다.

그리고 호수 저면의 누출 문제와 제방 붕괴에 대한 문제는 원천적으로 해결 방안을 수립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설정을 근거로 기본 계획을 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사막 한 가운데 있는 호수의 수질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 목적이 불분명 하다.

단순히 호수가 오염되어 깨끗하게 해야 한 다는 이유를 붙이기에는 뭔가 석연치가 않다.

그리고 매일 5,000cu.m의 오수를 가져다 버리면서 수질을 개선 한다는 논리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수집해 본다.

지역신문이며 머스크 레이크에 관한 신문기사들을 스크랩해보니 대충 이렇게 정리가 된다.

오수를 버리는 자동차를 제3국 노동자들에게 그냥사주고 1일 2회식 머스크레이크 상류에 버리면 2년 후에는 그들에게 오수처리 자동차의 소유권을 넘겨주게 되는데 이 때문에 이를 운전하는 사람들이 난폭운전과 함께 버리는 장소에서의질서와 자동차 이동에 따른 먼지 등으로 젯다시에서 이를 해결하는데 골머리를 섞고 있다는 것과 우기시에 인근유역에서 유입되는 우수로 인하여 모래로 축조된 제방이 붕괴되기를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질오염에 따른 악취 등으로 인하여 지역 주민의 민원이 끈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제안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먼저 오래된 자연호수의 특성상 호수의 저면은 장기간 퇴적층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생각되고 이 퇴적층은 오염원의 진원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일단 준설을 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토목섬유 튜브에 준설 물을 채워 모래 제방 옆에 제방을 축조하여 재활용하도록 하므로 서 경비 절감과 구조물의 안정을 가져 오도록 한다.

이렇게 되면 호수의 수질 오염원을 제어 할 수 있는 것과 함께 제방도 안정성을 가져 올수 있도록 축조 하므로 서 일단 2가지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봤다.

그러나 젯다 시에서 발생되는 오수를 머스크 레이크 상류에다 버리는 한 오염원이 지속적으로 호수로 유입되게 되고 이는 수질개선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오염원이 전혀 유입되지 않는다 해도 바람 등으로 인하여 자연적인 오염원은 축적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일단 우기 시에 인근유역에서 유입되는 우수 및 오수는 전원 차단하는 것으로 설계 개념을 수립했다. 

오수는 젯다시에 요청하여 오수처리장을 건설하여 처리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제안을 하기로 하고 유입되는 우수는 호수로 직접 유입 되지 않고 인근 체류지나 저장소를 두어 중장기적으로 관리하도록 한다.

이렇게 한 후 호수내의 수질을 관리하기해서는 반드시 호수로 유임되는 영양물질을 제어 하기위하여 유입영양 물질의 제거를 위한 시설을 별도로 하도록 한다.

대략 설계 기본 개념을 이렇게 설정을 하고 제안서의 작성에 들어갔다.

수차례 수정을 통해 정리가 완료 되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협의를 거처 11월 05일 젯다시에 제안서를 설명하고 제출하는 일자가 정해 졌다.

사우디아라비아로 가기위해서는 비자가 있어야 하는데 사우디아라비아 비자는 반드시 현지에 있는 기업이나 공무원 등이 초정을 해야 하고 이를 주한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 첨부하여 받아야 하는데 무척 절차가 까다롭다.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 표와 비자를 준비 하고 11월02일에 출발하기로 했다.

 

2008년 11월 02일(일)

새벽 여명이 먼발치에서 닥아 오고있음을 감지하고 일어나니 5시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서 6시에 인천공항으로 가는 공항버스에 타니 손님이라고는 나 혼자 밖에 없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오전 8시경이 되었다.

캐세이 퍼스픽항공 발권창구에서 수속을 하고 비행기에 탑승을 하니 예정된 10시에 이륙을 한다.

3시간 30분정도 비행을 한 후 홍콩에 도착하여 3시간정도 공항을 배훼하다가 사우디 아라비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동남아인들로 한눈에 보기에도 모두들 일터를 찾아 떠나는 듯하다.

나이어린 여자들로부터 늙은 장년의 사람 등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분들이 빈자리 없이 비행기 안을 채웠다.

 

11시간정도 긴 여행을 한 비행기는 또 다시 바레인에서 2시간을 경유한 뒤 서울시간으로 3일 아침 6시 현지시간으로 03일 00시경에 리야드 공항에 도착을 했다.

집을 출발한지 꼭 24시간이 지나 갔다.

참으로 먼 거리다.

이렇게 먼 거리를 2,30여 년 전에 그렇게 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오직 돈을 벌려고 왔던 곳이다.

리야드 국제공항도 한국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많은 건물과 도로, 항만, 교량 등의 대규모 건설공사는 어김없이 한국 건설노동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일을 만들려고 이곳에 왔다.

그 시절엔 선진국에서 수주를 해서 하도급을 받아 인건비를 벌려고 왔지만 이젠 우리가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온 것이다.

집약된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함이다.

 

2008년 11월 03일(월)

11시에 호텔에서 관계자들과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로 했다.

굴지의 기업 필립호스만의 관계자와 왕세자 처남분이라는 압둘 씨가 참석한 가운데 세미나실에서 그 동안 준비한 자료를 진행 해 나갔다.

그리고 상호 토론이 매우 심도 있게 논의 되었다.

몇 가지 미비점을 보완하고 젯다시의 건설위원들이 질문할 예상 질문들을 하면서 여러 가지 상항을 점검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지적 사항과 프리젠테이션 구성 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시 호텔에서 재구성하기로 하였다. 왠지 모르게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이정도 비면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내리는 비치고는 굉장히 많이 내리는 비라고 한다. 사막에 비가 내리는 것은 아마도 좋은 징조가 아닌가! 쉽다.

 

2008년 11월 04일(화)

느지막이 일어났다. 오늘은 일행 모두 같이 제다로 가기로 했는데 어제 프레젠테이션 내용을 수정, 보완하는데 시간과 비행기 일정이 맞지 않아 나만 젯다로 먼저 가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오니 국제선과 국내선이 탑승권 발급 장소만 다르지 탑승 장소는 그제 입국했던 곳과 같은 곳에서 탑승을 했다.

공항에는 흰색 전통 복장을 한 사우디아라비안 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공항 한구석에는 한 무리들이 모여 기도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낮선 이방인이 보기엔 너무나 신기한 모습뿐이다.

혼자서 이렇게 다니다 보면 낮선 지역에서 오는 삭막함과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푼 그리움이 밀려온다.

리야드에서 동쪽으로 약 1,000km정도 떨어진 젯다로 오니 이틀간 계속해서 비가 내리던 리야드와는 다르게 젯다는 맑은 날씨다.

호텔까지 택시를 이용했다.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건설 장비를 하는 김 사장님을 만나 저녁 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같이 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비빔밥을 같이 먹고는 홍해 바닷가를 김 사장님의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했다.

다니는 도로, 항만은 건설공사의 대부분이 한국 노동자들의 땀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한다.

 

2008년 11월 05일(수)

오전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호텔을 나와서 시내를 마냥 걸어 봤다.

우리나라 자동차들이 거리에 가득하고 휴대폰, 가전제품의 광고도 눈에 띤다. 혼자서 거리를 같다 보니 오전 9시가 넘어서야 조그마한 토스트 가게들이 문을 연다.

아침도 먹을 겸 토스트 가게에서 토스트와 캔 콜라를 주문하니 3리알(1,000원)정도로 매우 싸다.

서민들이 주로 먹는 것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저렴하게 한 끼를 해결 했다.

상점들을 기웃 거리며 걸어가노라니 거리마다 특징이 있는듯하다. 모바일 폰의 거리, 펌프와 건자재거리, 조경용품 거리들이 보인다.

한참을 홀로 걷다가 또 다른 조그마한 토스트 가게가 나오기에 다시 들어가 토스트와 과즙음료를 시켜먹고 있노라니 젊은 친구가 말을 건넨다. 자기는 파이프 판매원이라고 하며 이것저것을 물어 온다.

색다른 곳에서 우연히 맞이하는 사람들과 같이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다 보면 같이 살아가는 지구촌의 인간 군상들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끼곤 한다.

Saudi Arabia Riyadh 국제 공항 천정

 

Saudi Arabia Jeddah 에서 머무렀던 호텔

 

 

Jeddah 시내(젯다시는 항구도시로 홍해에 있슴)

 

거리를 한 2시간 즘 걷다가 호텔에 돌아오니 김 사장님께서 연락이 왔다.

자동차를 보낼 테니 자기 사무실로 오란다.

바레인계 운전기사를 따라 사무실로 가니 건물은 조그마한 궁전처럼 잘 구며 져 있다.

차 한 잔과 몇 마디의 이야길 나누다 시내 구경을 가자며 자동차로 젯다 시내를 구석구석 돌면서 지난날 한국 노동자들이 붐볐던 이야기와 곁들여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야기가 안 되는 점도 많았지만 이 척박한 지형에서 살아가는 그들만의 문화가 아니겠는가.

일부다처제 사회, 자식이 30여명이 되는 가정, 왕족만 3,000여명이 넘는다는 이 나라, 우리가 과연 무엇으로 이야길 하겠는가?

이 척박한 사막에서 살아가노라니 오직 종교적인 믿음과 자식을 만드는 일 말고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시내를 다니다 다다른 곳은 굉장히 큰 마트였다.

우리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어느 곳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햄버그와 각종 인스턴트 음식점과 다양한 상품들이 즐비하다.

햄버그를 주문해서 먹고 있는데 잠시 후 스피크에서 뭐라고 하는 큰 소리가 나드니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기도 하는 시간인데 하루에 4번 정도 이렇게 한다고 한다.

오후 4시에 현지 건설 업체의 부장이 사무실로 오기로 되어 있어 서둘러서 호텔로 돌아 왔다. 잠시 후 족히 100kg은 넘어 갈 듯 한 커다란 체구의 40대의 사우디아라비안 인이 나를 찾는다.

호텔 로비에서 이번에 내가 젯다에 온 목적과 준비해간 자료를 가지고 이야길 풀어 갔다.

앞으로 있을 비행기장 건설과 지하댐의 건설, 양어장, 도로 건설 등에 참여를 부탁 했다.

 

2008년 11월 06일(목)

어제와 마찬 가지로 시내를 걸으며 작은 토스트 가게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호텔에 들어와 있노라니 김 사장님께서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한다.

오후에 이란으로 가야하기에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같이 터키 식당에서 양고기로 점심식사를 한 후 곧장 젯다 공항으로 태워다 준다.

이번 젯다는 김 사장님 덕분에 무척이난 편안하게 일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젯다에서 일어나는 일은 같이 협조해서 추진하기로 했다.

젯다에서 두바이로 오는 비행기는 국내선과 달리 사우디 아라비안인들 보다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탑승했다.

드시 초청장이 있어야 비자가 발급되는 방문하기가 매우 어려운 나라임에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사우아라비아를 찾는 것을 보면 아직도 그들에게는 당근이 많이 남아 있나 보다.

Saudi Arabia Jeddah국제공항(여긴 탑승을 위해서는 계류장이 없고 모두 버스로 이동해야 한다.)

 

두바이 국제공항 입국장 (입국십심사대 무척이나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입국심사가 끝나는데에는 대략 1시간 정도 소요됨. 갈아타는 분은 시간을 잘관리 해야 할것 같슴.)

 

입국장을 빠져나와 이란의 테헤란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고 3터미널로 이동 후 입구에서 공항이 너무 번잡하고 현재 공사 중이라 그런지 무척 난잡함.

 

두바이 공항 입국장 내부 1,2,3터미널이 있어 들어 가는곳은 다르지만 출국 수속이 끝나면 1,2,3터미널이 보세구역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캡슐형태의 건물로 길이가 무척 길고 많은 사람이 붐빔.

 

한적한 시골 같은 젯다 국제공항을 뒤로 한 체 중동에 보석 아랍 에미리트 두바이로 비행기는 날아올랐다.

중동의 보석 두바이는 그동안 소문만 들어온지라 자못 궁금하고 설렘 또한 있었다. 비행기가 도착 후 입국장으로 가는 길은 무척 멀다. 많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뒤섞여 입국장으로 한참을 걸어서 가니 입국장은 하염없이 길게 늘어선 대기자들로 만원이다.

때마침 서울에서 대한항공이 도착을 해서 한국 사람들도 많이 붐볐다.

서울에서 보시는 분들이라 그냥 반가웠다.

그러나 그들의 무리를 뒤로 한 채 나는 또다시 5시간 후에 출발하는 테헤란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위해 제 3터미널로 가니 아직 입주 항공사가 몇 안 되는 듯 터미널에는 승객은 나밖에 없는 듯 썰렁하다.

입국 수속을 하고 보세구역으로 들어오니 여긴 지금까지 보지 못한 궁전이 있었다.

거대한 캡슐처럼 생긴 국제공항은 거대한 궁전을 연상케 한다.

2층에는 특별히 마련된 1등석 손님을 위한 라운지가 마련되어 있고, 길게 펼쳐진 탑승구와 보세창구에는 전 세계인 들이 다양한 얼굴 색깔과 저마다의 언어를 가지고 쇼핑을 하고 있었다.

물론 긴 여행길에 항공기를 바꿔서 타기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은 바닥에 들어 누워 자기도 하고 나와 같이 노트북에 의지한 체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많다.

 

2008년 11월 07일(금)

새벽 3시에 도착한 테헤란(Tehran)은 지난 7월에 한번 온 적이 있는지라 입국비자를 무리 없이 받아 입국장을 벗어나 짐을 찾아 들고 나오니 지난 7월에 인천공항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이스파한에 있는 최 사장이 50대 중반의 영어를 조금은 할 줄아는 운전기사를 보냈다.

테헤란에서 이스파한(Esfahan)은 약 400km정도의 거리로 자동차로 가기엔 너무나 먼 거리인데 이 시간에 비행기도 없고 비행기를 이용하려면 국내선 터미널로 이동해야하는 번거로움을 해결해주려고 자동차를 보내 왔다.

3시에 출발한 자동차는 거침없이 남쪽으로 달렸다.

나는 밤잠을 자지 못한지라 자동차 뒷좌석에서 잠을 청하며, 자동차에 피곤한 몸을 내던졌다.

두어 시간 자동차에서 눈을 붙이고는 선 잠결에 보이는 풍경은 미세하게 벌어진 눈까풀 사이로 광활한 사막을 집어넣는다.

새벽여명이 가깝게 다가오고 차창에는 빗줄기가 사막답지 않게 내리고 있었다.

겨울의 을씨년스런 날씨와 운전기사의 졸음을 쫏기위해 열어 놓은 창문으로는 차가운 황소바람이 새벽의 찬 기운과 어울려 지면서 환기를 느끼게 한다.

창문을 열어 놓은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리는지 연신 춥지않느냐고 물어 보기에 괜찮다고 대답하고는 몸을 움츠려 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비행기 티켓은 우리 돈으로 약 30,000원정도면 되는데 우리처럼 온라인으로 발급이 되지 않아 항공사로 가서 비행기 표를 사서 나에게 전달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이 운전기사가 자기가 테헤란 까지 나를 데리러 오는 조건으로 우리 돈으로 9만 원 정도를 달라고 했단다.

기름 값은 싼 편이지만 기름 값을 포함해서 9만원을 벌요랑으로 이 머나먼 길을 야간에 운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3시에 테헤란 국제공항에서 출발한 택시는 4시간 정도 달려서 이스파한 직전의 조그마한 동네에 있는 최 사장 집으로 나를 안내한다.

집에는 한국에서 이 먼 곳까지 일을 하러 온 최 사장과 50대 중반의 한국분이 같이 있었다.

이 먼 곳에선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정겹다.

추위에 온몸을 떨었던 나에게 따끈한 차 한 잔을 같이 하고는 최 사장과 같이 이스파한 관광을 나셨다. 지난 이란 출장길에 인천공항에서 몇 마디 이야기 나눈 인연으로 이렇게 멀리에서 해후를 하며 서로 긴긴 이야길 나누었다.

밤새 나를 이곳 까지 데려다 준 영감님은 돌려보내고 최 사장회사에 근무하는 분이 약 40년 정도 된 자동차를 가지고 우리를 태우고 다니려고 나왔다.

오래된 자동차를 타는 것도 새로운 맛이다. 가장 먼저 간곳은 이스파한의 명소이며 이란을 대표하는 이맘광장으로 갔다 

 

 인구 160만을 헤아리는 이스파한은 동서남북과 사통팔달하는 교통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기원전 아케메네스 왕조 때부터 ‘가발’이라는 이름의 도시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7세기경에 이르러서는 ‘세파한’으로 바뀌었는데, ‘세파’는 페르시아어로 ‘군인’이란 뜻이고, 세파한은 그 복수형이다.

따라서 이때는 군인들의 집결지, 곧 군영이라는 뜻의 도시였다. 그리고 10세기까지만 해도 자얀데 강을 사이에 두고 페르시아인과 유대인들이 각각 사는 남북 두 개 도시로 나눠져 있었단다.

그 뒤 사만조와 지야르 조, 가즈나 조, 셀주크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러한 구분은 차츰 사라졌고, 13세기 중엽 몽골군의 침입을 받았으나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14세기 말 서쪽으로 원정하는 티무르에게 저항한다는 이유로 7만 명이나 학살당해 머리를 쌓아 언덕을 만들 정도로 큰 비극을 겪었다.

16세기 초부터 사파비조(1501-1732)의 지배에 들어갔으나 한때 오스만 군한테 함락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598년 제5대 아바스 1세가 수도를 가즈비에서 이곳으로 옮겨옴에 따라 전성기를 맞는다.

그때 여행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파한은 인구 100만에 사원이 160개, 학교 48개, 여관 1,800개, 공중목욕탕 273개를 가진 세계의 큰 도시였다. 그래서 이때 이스파한을 가리켜 ‘세계의 절반’이라 했다.

그러다가 18세기 전반 아프간 족의 침략과 이를 계기로 세운 잔드 조가 시라즈로 수도를 옮기면서 이스파한은 차츰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스파한은 ‘이란의 진주’, ‘세계의 절반’이라는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이슬람 세계 유수의 도시다.

어디를 가나 그 이름에 걸맞은 유적 유물이 많다.

그래서 가장 먼저 찾는 곳은 16세기 아바스 1세 때 만든 이맘 광장이다. 이란인들이 ‘세계의 그림’, ‘열린 박물관’이라고 즐겨 부르는 이 광장은 원래 ‘샤(왕)의 광장’이라 했다.

그러다가 이란 혁명 뒤 ‘이맘 호메니이 광장’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광장 한쪽에 있는 6층짜리 알리카푸 궁. 이란 최초의 고층 건물로서 왕이 귀빈들을 맞던 영빈 궁이다.

그리고 눈 아래 광장에서 펼치는 폴로 경기를 지켜보았다.

주변에는 남북 길이 512미터, 동서 길이 163미터의 널따란 긴 네모꼴 광장과 그 언저리에 자리한 건물들이 펼쳐져 있다.

남쪽인 오른쪽에는 이맘 사원과 자미아 사원이, 동쪽인 맞은편에는 샤이흐 로트폴라 사원이, 그리고 북쪽인 왼쪽에는 게이사리예 바자르가 들어서 있다. 광장은 남북에 각각 두 개씩 돌 골대가 박혀 있는 폴로 경기장이다.

한 마디로 페르시아 조형예술의 진수를 한데 모아 놓은 파노라마 현장이다.

왕족들만 이용하는 사원이라서 미나렛이 없는 샤이흐 로트폴라 사원은 아바스 1세가 장인이자 대설교자인 레바논 출신의 로트폴라를 위해 세운 것으로 17년(1601-1618)이 걸려 지었다.

쪽빛을 바탕색으로 해서 다양한 색깔의 타일로 모자이크한 벽은 최고의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되어 있다.

그 옆에는 자미아 사원이 있다.

대중이 집단으로 예배를 올리는 곳으로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역사도 오래되었다.

8세기에 지은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서 몇 번에 걸쳐 새로 보수 작업을 했는데, 지금 건물은 12-14세기에 고쳐 지은 것이다.

시대별 특색이 잘 나타나 이란의 사원 연구에 큰 구실을 한다.

당초무늬를 섬세하게 수놓은 미흐랍은 이란이 자랑하는 미술 걸작이다.

천장은 무려 470여 개의 작은 돔으로 연결되어 있다.

광장 이름을 바꾸었듯, 이맘 사원도 원래 ‘왕의 사원’이었으나, 지금은 이맘 사원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페르시아 건축의 백미라고 하는 이 사원은 아바스 1세의 명으로 161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왕이 죽은 뒤 1638년, 26년 만에 공사를 끝냈다.

건물의 겉모양 특징은 두 개의 미나렛과 정문을 메카쪽으로 45도 살짝 돌리고, 소리를 최대한 퍼지게 하기 위해 높이 54미터와 38미터 돔으로 된 이중 돔이다.

조용할 때 종잇장 뒤집는 소리까지 들린다고 하니 그 정밀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천장의 종유석 무늬를 비롯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화려한 모자이크는 보는 이의 혀를 차게 한다.

높이 48미터에 이르는 니마렛에서 튀어나온 부분은 다섯 손가락 자극 비슷한 것이 찍혀 있는데, 그것은 무함마드와 시아파가 숭상하는 이맘 알리와 부인 파티마, 아들 하산과 후사인 다섯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사원에는 17세기에 새로 지은 두 개의 마드라사가 달려 있는데, 각각 여름과 겨울에 문을 연다고 한다.

이맘 광장에서 또 한 가지 볼거리는 알리 카푸 궁 뒤편에 있는 ‘40개의 기둥’이라는 뜻의 체헬 소툰 궁전이다.

거울로 장식한 20개 기둥이 정원에 있는 연못에 비춰져 40개로 보인 데서 나온 말이다.

아바스 2세의 명에 따라 1647년에 영빈관으로 지은 궁전인데, 주목을 끄는 것은 6폭의 세밀화다.

그중 3폭은 오스만과 인도, 우즈베키스탄 왕들이 원조를 청하기 위해 내방할 때 베푼 연회 장면이고, 다른 3폭은 오스만과 두 번, 인도와 한 번 싸우는 전투 장면이다.

그밖에 여러 점의 섬세한 세밀화가 선을 보이고 있다. 인도 여인이 죽은 남편을 따라 불에 뛰어드는 순간 장면은 꼭 사실처럼 보인다.

원래 세밀화는 서양이나 사산 조 페르시아에서 종교 책의 삽화나 장식으로 쓰이다가 이슬람 시대에 이르러 바그다드 풍과 중국풍의 영향을 받은 일칸(이란)화풍의 두 파로 나뉘어 발전해왔다.

특히 사파비 조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면서 인도 같은 주변국들의 화풍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광장 북쪽에는 게이사리예 바자르가 있다.

천여 개의 점포를 거느리고 있는 이 재래시장은 이란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카펫과 금속세공품, 유리그릇, 그리고 온갖 토산품과 교역 품들로 꽉 차 있다.

특히 이곳은 사산 조 시대의 연주문이나 포도당초문, 수렵물 같은 전통 문양을 계승한 ‘페르시아 카펫’의 원산지다.

보통 카펫 한 장을 짜는 데 몇 년, 심지어 10년 이상이 걸린다고 하니 그 값어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이맘 광장은 단순히 성스러운 곳이 아닌 시민의 쉼터로 열어 놓고, 궁전이나 사원의 부속 건물을 전통 상품의 가게로 이용하며, 시오세 폴 다리를 여유작작하게 가닐고 그 밑에 차이하네 찻집을 차려놓고 오늘을 즐기는 이란 사람들. 그들은 문명의 창조품들을 울타리 안에 가둬 놓고 박제해 놓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삶에 살아 숨 쉬게 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탄압과 엄격한 이슬람주의 사회 분위기에서도 이란인의 지혜와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스파한의 이맘 광장이다.

이맘 광장의 정식 이름은 Meidam Emam 혹은 Naqsh-e Jahan felke이라고 한다.

16세기 프랑스의 시인인 Renier는 이맘 광장을 일컬어 “세계의 절반”이라 불렀다. 이맘 광장은 세계에서 천안문 광장 다음으로 큰 광장이란다.

처음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분수대와 연못이다.

여기는 원래 폴로 경기장이었다고 한다. 그 분수대 북쪽에 드넓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맘 광장은《사파비왕조의 아바스 1세가 1599년부터 건설한 이스파한의 중심광장이다.

동서 길이 160m, 남북 길이 510m로서 '샤(shah) 광장'이라고도 불렸다.

원래 각종 행사나 페르시아에서 비롯한 폴로 경기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4면이 2층으로 된 아케이드로 둘러싸여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사파비왕조 당시의 뛰어난 이슬람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광장 서쪽에 있는 알리카푸 궁전은 15세기의 티무르왕조 시대에 건설되었다.

궁전 계단 벽면에는 천국을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고 2층에는 호화롭게 장식된 거실이 있다.

맨 꼭대기 층에는 벽에 그릇·항아리·병 모양으로 된 니치를 설치하고, 아름다운 모양의 도자기를 진열해 놓은 치니차네(도자기의 방)가 있다. 궁전 서쪽에는 40개의 기둥이 늘어서 있는 체헤르소툰 궁전이 있다.

광장 동쪽에는 아바스 1세의 개인 예배소였던 셰이크 로트폴라 모스크가 있다.

돔 안팎과 벽면이 이곳 특유의 노란색을 중심으로 한 채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광장 북쪽에는 양옆에 전망 창이 달린 카이 사리야 문이 있고 그 안쪽으로 수크(시장)가 있다.

남쪽 끝에는 이란 이슬람 건축의 대표작인 이맘 모스크가 있다.

1612∼1630년 세워졌는데, 4기의 미나레트를 갖추었고 높이 47m에 이르는 거대한 알뿌리 모양의 돔을 얹고 있다.

돔 꼭대기 가운데는 단색 타일로 된 모자이크로 장식해 놓았고, 그 아래쪽에는 코란 문구를 채색타일로 새겨 넣었다.

1979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맘 모스크 입구에서 지도 한 장을 사려는데 이란 책자를 노인네가 같이 권유한다.

이란과 이스파한 지도와 이란 사진책자를 미화 35불에 샀다 무척 바가지를 쓴 것 같다.

이곳에 노동자 월급이 약 20만원(환화)정도 인데 약 4만 원 정도 주고 책을 샀으니 바가지도 엄청 바가지를 쓴 것으로 생각이 든다.

이암 광장을 이런 저런 이야기로 둘러보고는 아침 겸 점심으로 인근의 조그마한 토스트 집에서 음료와 간단한 식사를 하고는 걸어서 자연사 박물관으로 갔다.

한마디로 표현을 하면 우리나라 초등학교 자료실 같았다.

박제된 새들과 동물들, 우리가 어린 시절 방학 때만 되면 숙제로 어김없이 했던 곤충채집과 식물도감들이 즐비하게 질서 없이 전시되어 있었다. 근성으로 둘러보고는 자동차로 골목 깊숙이 자리 잡은 기독교의 산실인교회당이 있었다.

이슬람국가에 웬 기독교 예배당인가 했는데 이는 전쟁의 역사에서부터 기인한다고 한다.

교회를 나와 내가 이란에 물 때문에 왔다고 하니 굳이 이스파한에서 약 120km정도 떨어진 곳에 댐이 있으니 보여 주겠다고 한다.

이스파한을 벗어서 사막으로 들어선 자동차는 무섭게 질주를 한다.

사막의 독특한 풍경과 오랜만에 비가온 뒤의 청량함과 뭉게구름이 어우러진 산야는 너무 아름답다.

새벽녘에 이란에 도착해서 4시간을 달려 왔고, 또 다시 하루 종일 이스파한에서 자동차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려니 무척이나 피곤하다.

자동차에서 졸다가 깨기를 몇 번 댐 근처에 온 모양인데 좀처럼 운전하는 친구가 길을 찾지 못한다.

한참을 헤매다 물줄기가 멀리에서 보이는 댐을 발견하고 갔지만 이젠 입구를 막는다.

이방인은 출입이 통제 되어 있단다.

점심때가 지나고 해서 내가 살 요랑 으로 근사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자고 하니 또 다시 자동차는 이곳저곳을 다녔지만 결국은 찾지 못하고 조그마한 구멍가게에서 빵과 짝퉁 맥주를 사서 한적한 시골 놀이터가 있는 잔디밭에 모여 앉아 요기를 했다.

주변에 댐이 있어서인지 비교적 나무들이 많고, 농사를 짓는 모습과 나귀를 타고 다니는 노인네의 모습, 양떼들의 모습은 이채롭다. 상큼한 가을 날씨와 아름답게 물들인 나뭇잎이 잘 어울리는 동네를 벗어나 돌아오는 길가에는 생선을 들고 파는 사람들이 몇몇 서있다.

2시간 정도를 달려서 돌아온 이스파한은 저녁노을을 몰아내고 어둠을 깔고 있었다.

이곳은 휴일이 금요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시내에 붐빈다.

자얀데 강 근처의 케밥집에서 저녁으로 닭 다리를 뜯고는 밤에 가야 운치를 더한다는 자얀데강의 시오세 다리와 카쥬 다리를 건너 다녔다.

흐르는 물에 비치는 불빛이 아름다운 이 다리는 이스파한 다움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자얀데 강을 떼어 놓을 수가 없다.

글자 뜻 그대로 이 강은 이곳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강이다.

서남쪽 자그로스 산맥에서 시작해 이스파한의 중심부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도시를 남북으로 갈라놓고는 유유히 400킬로미터를 더 흐르다가 카비르 사막에서 자취를 감춘다.

강 위에는 11개의 크고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그중 5개는 옛날에, 나머지 6개는 최근에 세운 것이다.

가장 유명한 다리는 ‘시오세 폴’ 다리다.

1602년에 놓은, 길이 300미터 너비 14미터의 이 다리는 도시 중심에서 남북으로 뻗은 대동맥 차하르 바그 거리를 이어 주고 있으나, 유람의 운치를 살리기 위해 차는 다닐 수 없고 사람만 다닌다.

 

술과 가무가 없는 이 나라에 유일한 해방구 인지 다리 위와 아래에서는 구성진 노랫가락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둘러싸고 같이 박수치고 몸을 움직이며 그들만의 해방구를 만끽하는 듯하다.

새벽 공기를 맞은데다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밤공기는 무척이나 몸을 움츠려 들게 만들과 춥다.

그러나 낮은 이방인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 줄려는 마음에 이곳저곳을 보여 주는데 나는 왠지 몸이 축 처지는 느낌이 든다.

테헤란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밤 11시 아직 멀었으나 서로가 너무 피곤할 것 같아 공항으로 간다고 했다.

조그마한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터미널에서 잠을 껴안으며 시간을 보냈다.

밤 11시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을 해서 테헤란 국내선 공항에 도착을 했다.

지난 7월에 한번 와본 공항이라 당황하지 않고 택시 표를 USD $7을 주고 사가지고 호텔로 오니 이미 시간은 2시를 넘어 서고 있었다.

 

2008년 11월 08일(토)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는 식사를 하고 방에 있는데 야즈디 박사가 오전 8시 40분정도가 되어서 전화가 왔다.

호텔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로비에서 만나자고 한다.

3달 만에 다시 테헤란에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지난번 본적이 있는 SCWMRI의 모하메드 하디 다오우디 박사와 같이서 테헤란 시청으로 가서 RPCT(Reserch and Planning Center of Tehran)의 모하메드 타그히 마만푸어 센터장과 빗물 저장고의 시험시공과 신도시 개발 계획에 대해서 이야길 나누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테헤란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뉴타운 개발회사”에서 찾아 왔다. 앞으로 테헤란 인근에 4개소의 신도시가 개발 예정에 있고, 전국적으로 20개의 신도시를 개발한다고 한다.

가능하면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한다고 하고는 저녁에 신도시 개발 계획서를 호텔로 잔득 보내 왔다.

저녁에는 호텔로 신도시 개발 설계회사에서 나를 찾아와 빗물 저장과 이용에 대한 설계를 해 줄 수 있는지와 이에 대한 견적 등을 요청해와 자세한 내용을 주면 서울로 돌아가서 곧바로 자료를 준비해서 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곧장 야즈디박사와 호주 시드니 대학에서 같이 공부를 했다는 하미드 라히미프어 박사가 사장으로 있는 SAP사로 갔다.

설계 용역사로는 제법 규모가 있는 회사로 앞으로 이란에서 같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상호 협력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해서 서듯 동의를 했다.

 

2008년 11월 09일(일)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는 곧바로 체크아웃을 했다. 이번 출장의 마지막 날이다.

9시에 Shahr Investment사로 갔다.

부동산 투자회사다.

프리젠테이션실에서 회사개요와 향후 부동산 개발 계획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상호 업무 협력에 대한 양해각서에 서명을 했다.

공원에 빗물저장시설을 시범적으로 설치하고자 테헤란시의 공원관리국으로 곧장 자리를 옮겨 담당자와 이야길 나누고 공원으로 가서 실제 적용할 위치를 둘러보았다.

공원도 비교적 잘 정비가 되어 있고 우리보다도 더 잘되어 있는 물 관리 시스템을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할 판이다.

지하수를 끌어다가 공원전체에 물길을 만들어 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공원 중앙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있고, 동쪽으로는 소나무가 울창하다. 물론 어김없이 나무 밑에는 물이 고일 수 있도록 두렁을 만들어 놓았다.

점심도 그런 체 서둘러서 지난번 방문한 적이 있는 FRW(농림수자원부)에가서 차관급인 샤리피 포로드박사를 만났다.

지오맴브레인을 이용한 인공 댐과 새우양식장, 조림지 건설 등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FRW내에 있는 축구장에 시범적으로 설치할 수 없는지 둘러보고 가라고 한다.

서둘러서 잰걸음으로 둘러보고는 네댓 명의 공무원들의 질문을 뒤로 한 채 비행기 시간을 2시간 30분을 남겨 놓고 총알택시를 탔다. 한마디로 택시는 날아다녔다.

꽉 막히는 시내를 벗어나 공항으로 가는 길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내가 탄 택시는 우리나라 자동차인 대우의 시에로 인데 그렇게 좋은 자동차 인지 처음 알았다.

무지 잘 달렸다.

1시간을 남겨 놓은 저녁 6시에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을 한 후 이젠 택시비로 씨름을 하다가 결국에 기사가 달라고 하는 USD20불을 다주고는 공항으로 돌아와 무사히 입국 수속을 끝낼 수 있었다.

지난번 왔을 때 보다는 공항은 비교적 깨끗했다.

면세점도 몇 개가 늘어났고 가전 제품매장은 삼성브랜드가 독점하는지 크게 쓰여 있다.

다시 두바이로 가기 위해 비행기는 7시 정각에 이륙 했다.

두바이 공항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넘었다.

입국장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다.

한참을 걸어서 입국장으로 가니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전 세계 인종들이 다 모인 듯하다.

입국 수속을 받는 데만 족히 1시간정도 지난 것 같다.

짐을 찾아들고는 다시금 홍콩으로 가기위해 입국 수속을 했다.

출발시간은 01시15분 보세구역에 들어오니 11시 30분정도가 되었다.

약 1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어 보세구역도 둘러 볼겸 쇼핑을 할 요랑 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마누라 선물로 화장품을 하나 사고 딸 주려고 시계하나를 샀다.

이러고 있는데 전광판에 비행스케줄에 01시 15분에 홍콩으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안 보인다.

순간 비행기 탑승권을 보니 보딩시간이 12시15분으로 되어 있다.

지금 시간은 12시 30분, 머리가 쭛빗선다,.

온몸에 전율이 돈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아니 내가 시간을 잘못 본 것인가?

이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서울로 돌아가는 시간이 3일 정도는 이곳에서 체류를 해야 하는데 어쩌지 순간 별아 별생각이 교차하고 정신이 몽롱해 진다. 내가 왜 이런 실수를.... 미치겠다.

일단 가방을 들고 뛰었다 체면이고 뭐고 보이질 않는다.

사람을 밀치고 엘리베이터를 뛰고, 나는 순간 미처 있었다.

왜 괜히 선물을 샀나.

후회도 들고, 정신나간사람처럼 뛰었다.

128번 탑승구 입구에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니 사람이 아무도 없다.

미치겠다.

입구를 찾아 헤맸다.

자세히 보니 내가 헤매는 곳은 128, 탑승구는 129번이었다. 129번으로 오니 한 사람이 들어가고 있다.

숨을 몰아쉬며 탑승권을 주니 받는 항공사 직원은 너무 여유롭다.

홍콩가는것 맞냐니까 맞단다.

일단 들어 왔다.

그래도 미심쩍어 물어 보니 홍콩행이 맞단다.

무사히 비행기에 올랐다.

이젠 이 비행기가 맞는지 자꾸만 의심이 간다.

왜 이시 간 까지 출발을 하지 않았지.

그제야 시간표를 가방에서 꺼내어 보았다.

01시 15분 출발이 맞다 지금 시간은 12시 40분정도이고 내가 늦은 것이 아니다.

비행기 표에 보딩시간이 12시 15분으로 표기 대어 있는 것을 내가 착각한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진정제를 승무원에게 달라고 하니 없단다.

어찌되었건 무사히 비행기를 탓다.

드리고 비행기는나를 싣고 홍콩으로 출발을 했다.

 

2008년 11월 10일(월)

홍콩에 도착을 하니 12시 20분 서울로 가는 비행기는 오후 2시다.

두바이에서 너무 마음 고생을 해서 두바이에서 아들선물을 사지 못해 탑승구 가까운 쪽의 면세점에서 볼펜을 하나 사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무사히 홍콩을 떠나 무사히 오후 6시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이번 출장에서 만들어 진 일들을 부지런히 준비해서 보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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