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4일(목요일)
김천 직지사에 왔다.
아련한 기억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곳이다.
1974년 국민학교 5학년 때일 것으로 생각된다.
수학 여행지가 이곳이었다.
수학 여행비 640원, 아직까지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다.
결국 이 수학 여행비를 못 내서 김천 직지사 수학여행을 못 왔었다.
그 후로 한 번도 이곳에 와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찾은 김천 직지사다.
수학여행을 가는 날 아침에 학교를 가니 운동장에 모두 모이라고 했다.
수학여행을 가는 친구들과 못 가는 친구들은 따로 운동장에 줄을 세웠다.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은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가도 된다"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10여 명의 친구들은 10여리 길을 걸어가야 탈 수 있는 기차역으로 떠나는 뒷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이 비워준 텅 빈 운동장에 우두커니 한참을 있다가, 동네로 돌아왔다.
어른들은 모두들 들로 나갔고, 모두가 학교로 간 동네는 정정만이 감돌았다.
집 뒷산에 올라가 들녘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적막한 들판만을 우두커니 바라봤었다.
이런 자식이 못내 안타까웠던지 어머니가 못 간 답례로 40원의 용돈을 주셨다.
이 기억이 오랜 시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이곳이 김천 직지사 다.
찬 공기가 사찰 경내를 둘러싸고 있다.
막바지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 단풍과 오랜 세월 동안 자리 잡은 소나무 숲들이 감상에 졌게 한다.
차갑게 다가오는 상큼한 공기는 나의 옛 기억을 전해주는 듯하다.
젊은 청춘에 연민을 품었던 첫사랑의 그녀와 같이 직지사 경내를 걸었다.
그리움과 설렘이 교차한다.
그녀는 국민학교, 중학교 1년 후배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안동으로 난 유학을 떠났고, 1년 늦게 안동의 명문 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옆동네에 사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물론 그 전에는 서로 알지도 못했다.
전형적인 청순가련형에 약간은 허스키한 목소리, 단아한 자태가 마음을 끌리게 한다.
안동으로 유학 온 같은 중학교 졸업생들의 모임인 학우회에서 처음 만났고, 그 후로도 나의 자취집과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는 삼촌 집에서 학교를 다니는 그녀와는 가끔 안동에서 고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일요일 고향에서 안동으로 가는 버스길에서 만나곤 했었다.
그리고 난 대학을 가면서 그곳을 떠났고, 또 다른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
추석이며 설날에 가끔 고향에서의 회후가 있었지만 그냥 선후배 사이였다.
그녀의 집은 내 고향집에서 1km 남짓 떨어져 있는 탓에 서로 농로길을 따라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는 다리 위에서 만나곤 했다.
추석 땐 달이 무척이나 밝았다.
다리 난간 위에서 서로 마주 보고 앉아 그동안 객지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길 하다 헤어지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이어졌고, 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닐 때쯤, 그녀는 어느 추석 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늘 만났던 다리 위에서 밝은 달빛을 맞으며 이런저런 이야길 하다 헤어질 때쯤 말을 건네 왔다.
'선배 내일 뭐해'
"특별한 일은 없는데, 왜?"
'내일 나랑 읍내에 같이 가면 안돼?'
'괜찮아'
'그럼 내일 아침에 우리 동네 어귀에 있는 저수지로 와, 그곳에서 만나서 같이 읍내로 가게'
'그래 내일 만나'
다음 날 아침 저수지 둑 아래에서 만나 버스를 타는 곳까지 10여 리 길을 걸어서 군부대 정문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읍내에 도착해서는 그냥 따라갔다.
어느 돈카스 집으로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돈카스를 식혀 놓고는 말을 꺼냈다.
"선배, 내가 한 5년 정도 기다려 주면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가슴이 띠고, 설렘이 가득 밀려왔지만 대답을 못했다.
아니 아무런 이야기도 못했다.
가난한 고학생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었다.
그녀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난 아직 내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던 시절이다.
그렇게 헤어졌고, 늘 같은 방법으로 만나고 헤어졌다.
그리고는 89년 여름 그녀는 같은 직장 동료랑 결혼을 한다고 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갔지만 머릿속에 아련한 기억으로만 가슴 한번 깊숙이 쌓아 두었다.
젊은 청춘에 같이 다녔던 계룡산이며, 부안 격포 채석장, 밤 기차로 떠난 부산 태종대...
그리 많지 않았던 연애시절의 기억들이 늘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겨울 문턱에서 그녀를 만났다.
찾아온 곳이 이 직지사다.
많은 기억들이 빠른 속도로 곱씹어진다.
안동에서의 고교시절의 무용담도 어찌어찌하여 지나온 여정에 대한 이야기도 담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잔잔한 기억들도, 보릿고개를 넘어 힘겹게 살아왔을 부모님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이젠 아련히 뭉클하게 가슴을 적시고, 그렇게 간절했던 그녀가 옆에 있어도 손 한번 잡아 보지 못했던 지난날과 다르지 않은 설렘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미련만 가득해진다.
이젠 다시 곁에 올 수 없는 부모님들처럼, 그렇게 간절했던 사랑도 마음과 몸으로 부딪히며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힘없이 피어오르는 모닥불처럼 따스하지가 않다.
오늘 이 시간도 먼 훗날 또 다른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움터고 있을 것 같다.
이 아름다운 늦가을의 하루는 정겨움을 더하지만 지난 시간들은 그리움뿐이다.
이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또 이렇게 이야기를 품고...
여리고 어렸던 아이의 모습이 아련 그리며 지나가고, 하지 못했던 청춘의 가슴 여린 간절한 그녀와의 사랑의 속삭임도, 30여 년이 지난 이야기들로 엮어서 한적한 산사에 풀어냈다.
이렇게 늦가을의 이야긴 겨울 속으로 들어간다.
이 직지사의 산사에서 오랜 시간 버리지 못했던 수학여행의 기억과 젊은 날의 사랑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젠 떨쳐 버렸으면 좋겠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어린 시절, 다시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랑을 이젠 떨쳐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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