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나의 생각

승부

지오마린 GeoMarine 2025. 4. 17. 08:26

[뉴스토마토 칼럼]
“바둑은 둘이 두는 것입니다. 좋은 바둑은 한 명의 천재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영화 <승부>에서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국을 보며 남기철이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모든 대결에는 상대가 있다. 좋은 상대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를 지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나를 키워주기도 해서다. 그런 의미로 나는 김연아를 세계 정상으로 만든 8할의 공을 라이벌이었던 아사다 마오에게 돌리곤 한다.  

조훈현과 이창호는 각각 ‘조제비’, ‘돌부처’라는 별칭에서처럼 기보스타일이 정반대다. 조훈현은 화려하고 공격적인 바둑을 즐기는 반면 이창호는 느리고 수비하는 스타일이다. 자신이 아는 대로 가르쳤지만 이창호는 스승처럼 성장하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바둑을 찾을 거예요.”

이창호는 스승으로부터 배우되 자기 길을 개척했다. 스승의 발자국만 그대로 쫓아갔다면 스승과 나란한 자리에서 그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한편, 바둑의 황제 조훈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제자에게 패배한 이후 오랫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본인이 답이라고 믿었던 것이 무너진 일은 그에게 큰 열패감과 허무함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 역시 언제든지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배운다면서 인간적이고도 성숙한 어른의 모습으로 돌아와 정상에서 제자와 조우했다.  

두 사람 중 누구의 실력이 더 뛰어난지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바둑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이 느꼈던 감동을 지금의 우리도 똑같이 느껴보는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되었다. 헌재의 결정이 국민의 갈등을 봉합하는 계기가 되기보다 또 다른 혼란의 태동이 될 것임은 이미 예견했던 바이다. 파면이 결정되자마자 여당인사들은 앞다투어 출마의사를 밝히고 있다. 눈꼴사납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목소리로 자성하고 백의종군해도 지지를 보내기 어려운 판에 마치 본인들의 때가 온 것처럼 나서는 모양은 이미 충분한 자충수로 보인다.  

민주당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윤 전 대통령의 파면이 곧바로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장담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여론조사 결과로만 보면 이재명 후보가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높은 지지도 못지않게 비호감도 역시 높은 이 후보가 이전과는 다른 새롭고 통 큰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민주당에게 꽃길은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복의 시간이다. 탄핵을 찬성했건 반대했건 계엄이라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전 국민은 충격을 받았다. 회복에 필요한 약은 이번 대선을 아름다운 대결로 만드는 것뿐이다. 국민의 화합이 절실한 이 시점에 양당 후보가 서로를 ‘좋은 상대’로 만들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를 깎아내리면 내가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나도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법이니까.

승부를 겨루는 사람들에게 모든 대결은 사활을 건 싸움일 것이나 모든 대결이 냉혹하고 잔인한 것만은 아니다. 사제의 대결이 아름다웠던 이유도 그들이 나이와 경험을 초월해 서로를 최고로 대우했기 때문이다. 바둑의 본질은 전부 공격이라던 스승이 ‘무심(無心)’을, 오랫동안 이기기만을 바랐던 제자는 ‘성의(誠意)’를 말할 만큼 거듭된 승패 속에서 그들은 변화했지만 ‘상대가 누구든 이기는 게 프로의 의무’라는 원칙 하나는 끝까지 지켜냈다. 300번이 넘는 대국을 치르면서도 스승과 제자 누구 하나 쉬이 물러서지 않고 명국을 보여줬으니 말이다. 남기철의 말대로 과연 최고만이 아름다운 승부를 겨룬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 국민은 선거의 명국을 감상할 수 있을까? 정치계의 조훈현과 이창호의 명승부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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