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 김상욱의 ‘격물치지’
민주주의라면 최소한 ‘이것’은 해야지 [물리학자 김상욱의 ‘격물치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위태로운 시기를 겪었다. 우리가 지키고 복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민주정에 대한 격물치지의 자세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니까.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입력 2025.04.17 08:51
3월22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 선고를 촉구하는 사회대개혁 16차 범시민대행진 집회가 열렸다. ⓒ시사IN 신선영
3월22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 선고를 촉구하는 사회대개혁 16차 범시민대행진 집회가 열렸다. ⓒ시사IN 신선영
계엄과 탄핵 정국을 지나다 보니,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자주 듣는다.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볼 좋은 기회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도 자신을 민주국가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로버트 달은 저서 〈민주주의〉에서 조직(예를 들어, 국가)의 모든 구성원이 정치적으로 평등한 것을 민주주의의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한다. 그래야만 모두가 자신의 자유와 이익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은 적어도 타인이 멋대로 행사하는 악(惡)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국가는 합법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국가의 권력남용으로부터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할 수 있으려면 모든 구성원이 국가의 행위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1865년 미국의 남북전쟁 직후 제정된 수정헌법 제15조는 인종을 기준으로 투표권을 제한하는 것을 금했다. 노예로부터 해방된 흑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은 선한 의지만으로 불가능하다. 국가의 행위 결정에의 참여, 즉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해야 가능하다. 이후 흑인 16명이 상원 및 하원 의원에 당선되는 등 흑인의 정치권력이 점점 커졌다. 당황한 남부 백인들은 폭력을 동원하여 흑인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저지했다. 나아가, 투표하려면 읽기·쓰기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거나 적정 세금을 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추가하여 (다수가 문맹이었던) 흑인의 투표 참여를 원천 봉쇄했다. 헌법에는 인종을 차별하지 말라고만 되어 있기 때문에 위헌은 아니었다. 결국 1880년 61%이던 흑인의 투표율은 1912년이 되자 2%로 곤두박질쳤다. 흑인은 정치권력을 상실했고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힘들어졌다.
민주주의의 조건에 ‘평등’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막상 모두가 왜 평등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답하기는 쉽지 않다. 1776년 공포된 미국 독립선언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난 것은 자명하다고 하면서, 창조주가 인간에게 준 권리를 이야기한다. 이처럼 근대 민주공화국의 평등은 종교적 기원을 갖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모든 인간은 신의 평등한 자식이며, 불교에서도 모든 중생이 평등한 불성의 소유자라고 말한다. 필자의 생각에 굳이 종교까지 가지 않아도, 모든 인간은 동일한 종, 즉 호모 사피엔스로서 생물학적으로 평등하다.
민주주의는 평등 가운데 특히 정치적 평등을 추구한다. 하지만 모든 구성원이 정치적 평등을 누릴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을까? 경제, 외교, 국방, 과학, 의료 등과 같은 정치의 여러 문제는 분명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하다. 반면에 정치의 목표라 할 수 있는 정의, 공정, 행복, 평등, 생존, 복지 같은 것들은 윤리적·주관적 판단을 요구한다. 윤리적·주관적 문제에 종종 정답은 없다. 전문가의 판단만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의견이 필요한 이유이다.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평등한 구성원이 합리적이고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교육은 큰 가치를 갖는다. 근대 민주주의를 만든 18세기의 사상가들을 계몽주의 철학자라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776년 제2차 대륙회의에서 미국 독립선언문 초안 제출 모습을 그린 존 트럼불의 그림.ⓒWikimedia
자, 이제 실질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자. 어떻게 하면 모든 구성원이 정치적으로 평등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처럼 모두가 평등하게 정치에 직접 참여하면 좋겠지만, 근대 국가의 규모를 생각해볼 때 가능한 일은 아니다. 대의 민주주의, 그러니까 대표를 선출하여 정책 결정을 맡기자는 것이 근대 민주주의의 해답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 중세 유럽의 대의제를 결합한 대의 민주주의야말로 현대의 위대한 발견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은 대표를 어떻게 선출하고 감시·통제하느냐다.
파벌은 공익을 해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혼자 정치를 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초기 역사부터 정치적 파벌이 존재했다. 영국의 경우 군주를 지지하는 파벌과 지방 귀족을 지지하는 파벌로 시작하여, 각각 토리당과 휘그당으로 변모했다. 미국은 조지 워싱턴과 알렉산더 해밀턴을 중심으로 하는 연방파와 토머스 제퍼슨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파로 파벌이 나뉘었다. 공화파는 지금의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의 전신이다. 초기에 이런 파벌은 공공 이익에 해로운 것으로 여겼으나, 점차 대의 민주주의의 대표를 배출하는 정당으로 자리 잡는다. 대표는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구성원은 선출된 권력을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도록 언론, 출판, 집회, 결사와 같은 표현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 민주주의를 운용하는 이런 세부 규정은 헌법과 법률로 정한다.
법은 단순히 규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전근대 국가가 신이 부여한 군주의 권력에 의해 통치되었다면, 근대 민주국가는 헌법과 법률 같은 텍스트의 지배를 받는다. 텍스트로 모든 구성원의 정치적 평등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유대교는 텍스트를 신과 같이 섬긴 최초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성경〉은 단순한 경전이 아니라 고대의 헌법이고 법률이자 유대인의 모든 일상생활까지 지배하는 종합 지침서였다. 문제는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의 모든 세부 사항을 텍스트로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쓰여 있다. ‘일’이란 무엇일까? 안식일에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은 ‘일’일까 아닐까? 유대교 랍비들은 회의 끝에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키려면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이것은 전기를 흐르게 하는 행위이다. (랍비 생각에) 전기는 불(火)과 비슷한데, 불을 붙이는 것은 이미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층에 사는 노인은 안식일에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할까? 정통파 유대인이 내놓은 대안은 이렇다.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고 모든 층에 서도록 한다. 이것을 ‘안식일(shabbat) 엘리베이터’라 부른다.
텍스트는 불완전하다. 항상 어딘가 빈 부분이 있다. 빈 부분에 대해서는 해석이 필요하다. 〈성경〉의 해석을 두고 수백 년 동안 논쟁을 벌이던 유대인은 〈미쉬나〉라는 해설서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그 즉시 〈미쉬나〉의 해석을 두고 논쟁이 시작된다. 그 논쟁은 〈탈무드〉라는 새로운 경전으로 귀결되지만, 유대인들은 〈탈무드〉의 해석에도 동의하지 못했다. 〈미쉬나〉와 〈탈무드〉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성경〉에 〈신약〉을 추가하여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로 분리된다.
조선도 텍스트의 지배를 받은 국가라 볼 수 있다.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사서오경〉 같은 유교 경전의 문장과 그 해석을 암기해야 했으며, 경전의 해석을 두고 편을 나눠 목숨을 건 당쟁을 하기도 했다. 텍스트는 완벽할 수 없고, 언제나 해석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왕이 아니라 법이 통치하지만, 법이라는 텍스트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우리는 이번 계엄, 탄핵 국면을 거치며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목격하고 있다. 법에만 의존하는 민주주의는 성공하기 힘들다. 명문화되어 있지 않지만 지켜야 하는 암묵적 규범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법만 지키면 실패한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두 가지 규범을 제시했다. 첫째,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해야 할 적(敵)이 아니라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할 것. 비민주적 독재자의 전형적인 수법은 정적을 헌정 파괴자, 범죄자로 몰아붙이며 사소한 법률 위반을 문제 삼아 몰락시키는 것이다. 둘째, 반대파를 괴롭히기 위해 법률적 특권을 휘두르지 말 것. 법을 어기는 것은 아니지만, 상식이나 통념으로 볼 때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상대를 공격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결국 상식과 통념은 텍스트만큼이나 중요하다. 합법적이라고 해도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자주 하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이오시프 스탈린.ⓒAP Photo
1801년 3월4일은 민주주의 역사의 이정표다.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를 통해 권력을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평화롭게 넘겨준 날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지 않고 경쟁 상대로 여기며 순순히 권력을 넘겨주는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상대 정당을 공존할 파트너로 여기는 것은 민주주의의 첫째 규범이다. 우리도 1998년 김대중 정권 이래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이어왔다. 2020년 미국의 트럼프와 같이 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부정선거 음모론을 퍼뜨리는 것은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최소한 독재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도 민주주의는 군주의 독재를 거부하며 만들어진 제도이지 않은가. 독재자는 항상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다. 나치 독일에서 히틀러의 말은 진리였고, 소련의 스탈린은 살아 있는 신(神)이나 다름없었다. 유발 하라리는 〈넥서스〉에서 민주주의는 강력한 자정 장치를 갖춘 분산된 정보 네트워크라고 했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분산되어 서로 감시한다. 삼권분립은 독재를 막을 신의 한 수다. 나아가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고 정보를 공개하며, 사법부는 법의 해석을 통해서 권력을 견제한다. 독재자가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흔한 방법은 자정 장치를 공격하는 것이다.
자정 장치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누구나 잘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정치적 평등을 구현하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원래 복잡하다. 많은 사회문제에 종종 정답은 없다. 단순한 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독재의 특징이다. 대통령은 틀릴 수 있다. 다수의 국민이 틀린 판단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알았을 때 인정하고 고치는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위태로운 시기를 겪었다. 우리가 지키고 복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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