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구만들기/물과 우리

물에 빠진 경복궁

지오마린 GeoMarine 2013. 4. 3. 18:08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물에 빠진 경복궁 기사입력 2013-04-01 10:46

경복궁 근정전에서 확인된 은제 육각판. 경복궁을 화마에서 지키려는 일념으로 물 水자를 새겨넣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1997년 11월, 경복궁 내 경회루 연못을 준설하던 이들이 재미있는 유물 하나를 건져냈다.
 혀를 쑥 내밀고 콧수염을 동그랗게 만, 해학적인 형상의 청동용(龍)이었다. 조사단이 급히 <경회루전도>를 꺼내보았다.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는 경복궁이 중건되기 시작한 1865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정학순(丁學洵)이라는 인물이 썼다는데 경회루의 건축원리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을 보면 경회루는 <주역(周易)>의 원리에 따라 (경복궁의) 불을 억제하려고 조성됐음을 알 수 있다. 즉 경회루의 모든 구성은 숫자 6으로 이뤄졌다는 것. 무슨 말이냐. 음양오행으로 보아 음(陰)은 물(水)을 말하는데, 그 음의 대표적인 숫자가 6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경회루 연못 안에 구리로 만든 용 두마리까지 넣었다. 그것이 바로 연못에서 건져낸 청동용이었던 것이다. 용은 ‘물의 신(神)’으로 알려져 있다. 가뭄 때 용에게 기우제를 지내고, 어민들은 풍어를 위해 용왕님께 제사를 지낸다. 또 불을 다스려 화재를 막아주는 신령스런 동물로 알려져 있다.

 ■물바다가 된 경복궁
 그런데 4년 뒤인 2001년 6월, 근정전 중수공사를 위해 종도리를 살피던 조사단의 눈이 반짝거렸다.
 1867년 경복궁 중수가 끝났음을 알리는 상량문(上梁文)이 발견된 것이다. 공사 담당자 156명의 명단과 흥선대원군의 업적 등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조사단의 눈귀가 번쩍 뜬 까닭이 있었다.
 물(水)과 용(龍)으로 도배한 부적 3점과 육각형판 5점 때문이었다. ‘용’ 부적의 목적은 분명했다.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물의 신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문제는 깨알같은 용(龍)자 1000여 자로 메워 쓴 수(水)자 부적이었다. 그것도 한 장이 아니라 두 장이 있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육각형 은판이 5점 발견됐는데, 이 또한 흥미를 자아냈다. 1점 당 폭 3.6㎝, 두께 0.25㎝의 육각형 은판의 모서리마다 물 수(水)자가 새겨져 있었다. 왜 육각형인가. 앞서 밝혔지만 물은 음양오행상 음(陰)이며, 음의 대표적인 숫자는 6이라니까.
 “그런데 육각형 5점을 붙여보면 재미있는 글자가 됩니다. 물 수(水)자가 3개 모여 ‘무르익을 묘(묘)’자가 되는 겁니다. 묘자는 ‘물이 아득하다’, 혹은 ‘수면(水面)이 아득하게 넓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은판을 싼 종이에도 묘(묘)자를 써놓았다. 물 ‘水’자에 한맺힌 사람처럼 도배를 한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근정전의 정면 서쪽 계단 옆에는 ‘드므’를 설치했다. ‘드므’는 무쇠로 만든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 말이다. 목제건축물 앞에 드므를 설치하고 물을 담는데, 그 까닭이 재미있다. 건축물이 화재에 휩싸였을 때 화마(火魔)가 드므의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설치한 것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는 해태상을 세워놓았다. 해태는 불을 먹는 물귀신을 뜻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경복궁을 ‘물바다’로 만든 것이다. 왜일까. 흥선대원군은 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경복궁을 ‘물바다’로 조성했을까. 두 말 할 것 없이, 불(火) 때문이었다.
 1394년(태조 2년) 창건된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었다. 하지만 불에 민감한 팔자를 타고 난 것일까. 차천로(車天路·1556~1615년)의 <오산설림(五山說林)>은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벌인 경복궁의 위치논쟁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다.

깨알같은 용(龍)자 1000여 자로 메워 쓴 수(水)자 부적. 용은 임금을 상징하지만 또 물의 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200년 뒤에 큰 일난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스승의 예로 대하며 도읍할 곳을 물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한양’을 점치며 말했다.
 “인왕산(仁王山)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백악(白岳)과 남산을 좌청룡·우백호로 삼으시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정도전은 난색을 표했다.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南面), 즉 남쪽을 바라보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대사의 말씀대로 한다면 임금은 동면(東面)해야 한다는 소린데, 그런 말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무학대사는 알듯 모를 듯한 경고메시지를 남겼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200년 뒤에 내 말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화제화론(以火制火論)
 무학대사가 걱정한 까닭이 있었다. 경복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관악산 때문이었다. 관악산은 얼핏 보아도 불이 활활 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풍수상 관악산은 불의 산이다.
 그 불의 산으로부터 뻗어나는 화기(火氣)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됐다. 이름도 숭례문(崇禮門)이라 지었다. 예의를 숭상한다는 뜻도 있었지만, 숭(崇)자도 불의 뜻을 갖고 있고, ‘예(禮)’자는 오행(五行)으로 치면 ‘화(火)’를 일컬었다. 또 오방(五方)으로는 남쪽을 나타냈다. 이 숭례문의 현판을 가로가 아닌 세로로 세운 것도 바로 관악산의 화기 때문이었다.
 즉 나무나 종이를 태울 때 잘 타라고 세우는 게 보통이다.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운 까닭이다. 세로로 세워놓음으로써 맞불을 놓은 것이다. 그것을 ‘이화제화(以火制火)’라고 할까. 어쩌면 현판을 세로로 세웠으니 “자 관악산이나 활활 타라”고 한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용 없었다. 1553년(명종 8년) 경복궁은 근정전만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이 모두 소실됐다. 강녕전, 사정전, 흠겸각이 불탔고 각종 금은보화와 왕·왕비의 고명과 의복, 거마가 잿더미가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는 또 한 번 불바다가 된다. 파죽지세로 쳐올라가던 왜군이 평양성 전투 패전 이후 퇴각하면서 벌어진 참화였다. 왜군은 궁궐과 종묘를 불태운 뒤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다. 무학대사가 예상했다는, 바로 그 200년이 지난 것이다.

경복궁 경회루 연못 준설작업 중 출토된 청동용.혀를 쑥 내밀고 콧수염을 동그랗게 만, 해학적인 형상의 청동용(龍)이었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논쟁을 전한 차천로는 이 대목에서 신라 의상대사가 지었다는 <산수비기(山水秘記)>를 인용하면서 무학대사를 극찬했다.
 “<산수비기>를 보면 ‘도읍을 선택할 때 중(僧)의 말을 믿으면 약간 오래 갈 희망이 있고 정가(鄭哥) 사람이 나와 시비를 하게 되면 5대를 가지 못하여 자리다툼의 화가 생기고, 200년이 못가서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리는 난이 날 것이니 조심하라’ 했다. 의상대사는 800년 뒤의 일을 미리 알아 착착 들어맞혔으니 어찌 성승(聖僧)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중은 무학을 가리키는 것이요, 이른바 정가라는 사람은 바로 정도전을 말한다. 그러고보면 무학도 신승(神僧)이 아닐 수 없다.”
 ‘5대 후의 자리다툼’은 계유정난, 즉 수양대군의 왕위찬탈(1453년)을, ‘200년 후의 난’은 1592년 벌어진 임진왜란을 뜻한다. 참으로 소름 끼치는 예언이었으니 차천로는 의상과 무학을 칭송한 것이다.
 반면 정도전을 두고는 나라를 찬탈할 흉적으로 폄훼하며 맹비난했다.
 “정도전이 어찌 무학대사의 말이 옳은 지 몰랐겠는가. 그는 다른 마음이 있어 나라에 틈이 있을 때 빼앗으려 했기 때문에 듣지 않은 것이다. 소인(정도전)의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한다’는 마음이 집안을 해치고 나라를 흉하게 하려는 계책이었으니 통탄할 일이다.”(<오산설림>)
 어디 정도전이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에서 그랬을까. 대역죄를 뒤집어쓰고 참살당한 것도 억울한데, 150년, 200년 후의 흉사에도 원죄가 있다는 식으로 비난을 받았으니 딱한 일이다.

불의 형상을 하고 있는 관악산. 관악산의 화기를 잠재우려 조선왕조는 무던히 애를 썼다

■‘임금이 솔선수범하라.’
 경복궁은 그 뒤 270년이 지나도록 중건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급기야 1865년 황폐화 한 경복궁을 다시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무너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하지만 첩첩산중이었다. 공사비를 조달하지 못해 200여 일이나 공사가 중단됐다.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고육책을 썼지만 민심을 잃었다.
 가뜩이나 힘든 대원군의 발목을 잡은 것은 잇단 화재였다. 화재방지를 위해 갖가지 방책을 세웠지만 화마는 끊이지 않았다. 중건 6년 만인 1873년 12월 자경전·교태전·자미당에 화재가 일어난 것이다.
 이를 다시 고치기 위해서는 무려 30만냥의 비용이 필요했다. 하지만 재정난이 심각했다. 급기야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최응(李最應·1815~1882)이 나섰다. “제발 임금이 좀 솔선수범하라”는 요지의 충언을 올린다.(<고종실록> 1875년 5월10일)
 “재정이 고갈됐습니다. 절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 전각(자경전·교태전·자미전)을 중건하는데 경비가 이미 바닥났고, 내탕고(왕실의 곳간)도 텅비었습니다. 전하께서 절제하고 소박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지긋지긋한 화마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공사가 재개됐다. 2차 중건은 15개월이 지난 1875년 3월이 돼서야 끝났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화마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을 끝까지 괴롭혔다. 17개월 후인 1876년 11월 또다시 대형화재가 경복궁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 화재로 교태전 등 무려 830여간이 전소됐다. <실록>의 기사 내용만 봐도 얼마나 큰 화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복궁에 화재가 일어났다. 830간이 잇달아 불길에 휩싸였다. 화재가 갑자기 일어나 불기운이 매우 빨랐다. 순식간에 여러 전각이 몽땅 재가 됐다. 열조의 어필과 옛 물건은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대보와 세자의 옥인 외에 모든 옥새와 부신(符信·신표)이 불탔다.”
 그로부터 132년이 지난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이 불탔다. 그나마 경복궁이 불타지 않은 게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워둔 덕분일까. 숭례문이 관악산의 화기를 고군분투하면서 막아낸…. 그래서 불행중 다행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경복궁을 물바다로 만든 풍수학의 개가인가? 모두 아닐 것이다.
 풍수가(목을수씨)의 이야기가 귓전을 때린다.
 “풍수요? 그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몫을 할 뿐입니다. 우선 민심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모든 위험을 막아내는 예방조치를 마련해야죠. 풍수만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국고를 탕진해가면서, 민심의 이반을 읽어내지 않고 강행한 경복궁 중건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듯 하다. 그러고 보니 숭례문이 불탄 지 5년이 지났다. 너무 오래된, 잊혀진 역사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