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감미음료, 꿀물
인류가 가장 먼저 즐긴 감미음료는 자연에서 채취한 꿀을 물에 타서 마시는 꿀물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석기인들도 천연꿀을 먹었겠지만, 벌을 길러서 꿀을 채취하는 양봉(養蜂)은 대략 기원전 2600년경 이집트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경우는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이 편찬한 [고사전(高士傳)]에 따르면 2세기 중엽에 살았던 강기(姜岐)란 자가 벼슬길에서 물러나 벌을 키웠고, 벌 키우기(養蜂)를 많은 이들에게 가르쳐 이것으로 직업을 삼은 자가 30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황극천황(皇極天皇)>2년(643년)의 “백제의 태자 여풍(餘豊-豊章)이 벌통 네 개를 가져와 삼륜산에서 놓아길렀으나, 끝내 번식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통해 보았을 때, 3세기 이후 중국-(고구려)-백제-왜국 순으로 양봉이 전해졌을 것이다. 신라의 경우 683년 신문왕(神文王)이 왕비를 맞이하기 위해보낸 폐백 물품에 꿀(蜜)이 포함되어 있다. 폐백으로 꿀을 보낸 만큼, 이미 신라에서도 양봉을 하여 꿀을 채취해 먹었을 것이다. 꿀은 너무 달기 때문에, 직접 먹는 것보다는 물에 타서 먹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꿀물(蜜水)은 삼국시대 사람들이 마셨던 음료라고 할 수 있겠다.
기록에 보이는 삼국시대의 음료
기록에 등장하는 삼국시대 사람들이 마신 음료로는 난액(蘭液)과 박하차(芳荷茶), 장수(漿水)가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편에는 가야의 김수로왕이 허황옥 일행을 맞이하여, 난액과 혜서(蕙醑)라는 향풀로 만든 술을 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의 난액을 차(茶)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보다는 뜻 그대로 난초의 향이 나는 음료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김유신이 645년 바삐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는 도중에 자신의 집앞을 지나면서 장수를 가져오라고 하여 마시고는, 우리 집 물이 아직도 예전 맛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때에 김유신이 마신 장수(漿水)는 평범한 우물물로 볼 수도 있으나, 청량음료로 볼 수도 있다. 동위(東魏)의 고양태수 가사협(賈思勰)이 530〜550년경에 편찬한 [제민요술(齊民要術)] 9권 86장에 등장하는 한식장법(寒食漿法)에 “밥을 지어 뜨거울 때 독 속에 넣어 시어지게 한 후, 다시 3,4일이 지난 다음 새로 지은 밥 한 사발을 덮어준다. 밥을 퍼낼 때마다 냉수를 첨가한다. 여름이 지나도 썩지 않으며, 물이 차가우면 매우 청량하다.”고 하였으니, 장수는 곡물을 발효시켜 만든 신맛의 음료로 식혜와 유사한 음료라고 할 수 있겠다.
송나라 때의 의학자 소송(蘇頌, 1020〜1101)이 지은 [도경본초(圖經本草)]에는 “신라 박하는 줄기와 잎이 깨처럼 뾰쪽하고 길다. 겨울을 지내도 뿌리는 죽지 않는데, 여름과 가을에 줄기와 잎을 따서 땡볕에 말려 사람들이 차를 만들어 마신다.”고 하였다. 박하는 소화불량, 감기, 두통 등의 치료 약재로도 쓰이지만, 신라인들은 머리를 맑게 하는 차로 마셨던 것이다.
기록에 등장하는 것 외에도 삼국시대 사람들이 마셨음직한 음료로 이웃한 한(漢)나라에서 마셨던 이(酏), 량(凉), 의(醷), 락(酪), 미(糜) 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酏)는 엿을 물에 푼 것이고, 량(凉)은 미숫가루를 물에 넣고 얼음을 섞은 것, 의(醷)는 매실을 물에 푼 것, 락(酪)은 요구르트, 미(糜)는 죽이다. 부여에서는 여름철에도 시신을 얼음에 넣어 보존한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에서도 석빙고를 만들어 여름에도 얼음을 사용했던 만큼, 량과 같이 얼음을 섞은 음료를 마셨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락(酪)의 경우는 소와 양을 많이 키운 고구려 사람들이 많이 마셨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음료
1123년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 왕성 큰 길가에 10간 간격으로 큰 독에 백미장(白米漿)을 담아 놓고 길 가는 사람 누구나 마시게 하였는데, 이를 시수(施水)라 하며, 그것을 준비하여 왕성을 왕래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마실 수 있게 했는데, 신분의 차를 가리지 않았다. 스님이 이를 관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백미장은 흰 쌀을 푹 끓여 얻은 시큼한 맛의 발효 음료일 것이다. 같은 책에는 고려의 고관 귀족들은 목이 긴 병(提甁)에 숙수(熟水)를 담아 시종으로 하여금 들고 따르게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숙수 또한 고려 사람들이 마신 음료인데, 숭늉 등의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1313년 효가(曉可)란 승려는 스스로 깨우쳤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켰는데, 꿀물과 쌀가루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이것이 자신의 몸에서 나온 ‘감로사리(甘露舍利)’라고 속였으며, 사람들이 속아 그것을 마시거나 간직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색(李穡, 1328~1396) 또한 여름에 얼음 꿀물을 마시기도 했다. 고려에서는 해마다 여름철 종실과 높은 벼슬을 한 신하들에게 얼음덩이를 나누어 주었으므로, 귀족들은 얼음을 넣은 청량음료도 마셨던 것이다. 이색은 인삼탕을 뜨거운 화로로 끓여 먹기도 했다. 고려시대가 차 문화의 전성기이기는 했지만, 고려인들은 차 이외에도 여러 음료들을 마시기도 했던것이다.
다양한 음료가 발전한 조선
음료 문화는 그릇의 발전과도 관계가 깊다. 칠기(漆器), 도기(陶器) 등이 아직 널리 전파되지 못한 고조선과 삼국시대 초기는 음료문화가 발전하기 어려웠다. 고려는 차(茶) 문화가 크게 발달한 탓에 다른 음료가 많이 소비되지 못하였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차 소비가 줄면서, 다양한 음료가 발전하게 되었다. 흔히 인삼차,생강차 등 찻잎을 사용하지 않는 것임에도 ‘차’라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에 등장한 다양한 음료들이 차를 대신하였기에 불린 것이다. 인삼차는 인삼탕(湯)이라고 해야 옳다.
차를 대신한 음료로 등장한 것 가운데는 약재(藥材)나 식물의 꽃, 열매들을 이용한 것이 많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얻기 쉬운 재료로 음료를 만들었기에,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