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구만들기/물과 우리

한국의 음료

지오마린 GeoMarine 2013. 4. 3. 18:18

한국의 음료_자연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로 만들다

음료(飮料)는 사람이 마실 수 있도록 만든 모든 액체로, 물과 술, 차와 커피 등을 포함한 기호음료, 유제품, 천연과즙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이 가운데 술과 차를 제외한, 우리 조상들이 마신 음료에 대해 살펴보자.

 

 

 

고분 벽화에 등장한 음료의 정체는?

 

안악3호분 고분 벽화에 그려진 화려한 그릇. 이 그릇 속에 담길만한 음료로는 인삼탕, 오미자탕, 꿀물일 가능성이 크다.

안악3호분 고분 벽화에 그려진 화려한 그릇. 이 그릇 속에 담길만한 음료로는 인삼탕, 오미자탕, 꿀물일 가능성이 크다.


음료의 기원은 자연에서 얻은 물에 있다. [삼국지]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들은 계곡에서 샘솟는 물(潤水)을 마시며 살았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생수를 마시기에 매우 적합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물을 끓여 마시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수만을 마신 것은 아니었다. 특정 재료를 첨가해 물맛을 좋게 하는 법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357년에 만들어진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에는 여자 주인공을 위해 시녀가 뚜껑이 달린 화려한 그릇에 음료를 가져다주는 장면이 있다. 뚜껑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생수는 아니고, 탕(湯) 종류의 음료라고 하겠다. 그 중에서도 인삼탕, 오미자탕, 꿀물 등이 그릇에 담겨질 가능성이 높다.

 

인삼은 고구려가 원산지이며, 이 무렵에 외국에도 알려졌던 만큼 가능성이 있다. 인삼탕은 조선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에도 내놓은 귀한 음료였다.

 

양(梁)나라 사람 도홍경(陶弘景, 456〜536)이 쓴 [본초집경주(本草經集註)]란 책에는 “오미자(五味子)는 고려에서 나는 것이 가장 품질이 좋아 살이 많고 시고 달다”고 할 만큼, 고구려에서 외국에 수출까지 한 열매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영조 12년 4월 24일자 기록에 “짐이 목이 마를 때에 간혹 오미자차(탕)를 마시는데, 남들이 간혹 소주인 줄 의심한다.”고 할 정도로 오미자탕은 갈증 해소에도 좋은 음료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1633년 병이 든 영중추부사 이원익에게 내의원에서 독삼탕(獨蔘湯)에 사탕(砂糖) 가루를 넣어 수시로 마셔 원기를 보충하고, 오미자차로 갈증을 멈추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인조(仁祖)가 오미자를 보내주라고 한 기록도 보인다.

 

 

 

 

가장 오래된 감미음료, 꿀물

인류가 가장 먼저 즐긴 감미음료는 자연에서 채취한 꿀을 물에 타서 마시는 꿀물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석기인들도 천연꿀을 먹었겠지만, 벌을 길러서 꿀을 채취하는 양봉(養蜂)은 대략 기원전 2600년경 이집트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경우는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이 편찬한 [고사전(高士傳)]에 따르면 2세기 중엽에 살았던 강기(姜岐)란 자가 벼슬길에서 물러나 벌을 키웠고, 벌 키우기(養蜂)를 많은 이들에게 가르쳐 이것으로 직업을 삼은 자가 30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황극천황(皇極天皇)>2년(643년)의 “백제의 태자 여풍(餘豊-豊章)이 벌통 네 개를 가져와 삼륜산에서 놓아길렀으나, 끝내 번식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통해 보았을 때, 3세기 이후 중국-(고구려)-백제-왜국 순으로 양봉이 전해졌을 것이다. 신라의 경우 683년 신문왕(神文王)이 왕비를 맞이하기 위해보낸 폐백 물품에 꿀(蜜)이 포함되어 있다. 폐백으로 꿀을 보낸 만큼, 이미 신라에서도 양봉을 하여 꿀을 채취해 먹었을 것이다. 꿀은 너무 달기 때문에, 직접 먹는 것보다는 물에 타서 먹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꿀물(蜜水)은 삼국시대 사람들이 마셨던 음료라고 할 수 있겠다.

 

기록에 보이는 삼국시대의 음료

기록에 등장하는 삼국시대 사람들이 마신 음료로는 난액(蘭液)과 박하차(芳荷茶), 장수(漿水)가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편에는 가야의 김수로왕이 허황옥 일행을 맞이하여, 난액과 혜서(蕙醑)라는 향풀로 만든 술을 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의 난액을 차(茶)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보다는 뜻 그대로 난초의 향이 나는 음료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김유신이 645년 바삐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는 도중에 자신의 집앞을 지나면서 장수를 가져오라고 하여 마시고는, 우리 집 물이 아직도 예전 맛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때에 김유신이 마신 장수(漿水)는 평범한 우물물로 볼 수도 있으나, 청량음료로 볼 수도 있다. 동위(東魏)의 고양태수 가사협(賈思勰)이 530〜550년경에 편찬한 [제민요술(齊民要術)] 9권 86장에 등장하는 한식장법(寒食漿法)에 “밥을 지어 뜨거울 때 독 속에 넣어 시어지게 한 후, 다시 3,4일이 지난 다음 새로 지은 밥 한 사발을 덮어준다. 밥을 퍼낼 때마다 냉수를 첨가한다. 여름이 지나도 썩지 않으며, 물이 차가우면 매우 청량하다.”고 하였으니, 장수는 곡물을 발효시켜 만든 신맛의 음료로 식혜와 유사한 음료라고 할 수 있겠다.

 

송나라 때의 의학자 소송(蘇頌, 1020〜1101)이 지은 [도경본초(圖經本草)]에는 “신라 박하는 줄기와 잎이 깨처럼 뾰쪽하고 길다. 겨울을 지내도 뿌리는 죽지 않는데, 여름과 가을에 줄기와 잎을 따서 땡볕에 말려 사람들이 차를 만들어 마신다.”고 하였다. 박하는 소화불량, 감기, 두통 등의 치료 약재로도 쓰이지만, 신라인들은 머리를 맑게 하는 차로 마셨던 것이다.

 

기록에 등장하는 것 외에도 삼국시대 사람들이 마셨음직한 음료로 이웃한 한(漢)나라에서 마셨던 이(酏), 량(凉), 의(醷), 락(酪), 미(糜) 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酏)는 엿을 물에 푼 것이고, 량(凉)은 미숫가루를 물에 넣고 얼음을 섞은 것, 의(醷)는 매실을 물에 푼 것, 락(酪)은 요구르트, 미(糜)는 죽이다. 부여에서는 여름철에도 시신을 얼음에 넣어 보존한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에서도 석빙고를 만들어 여름에도 얼음을 사용했던 만큼, 량과 같이 얼음을 섞은 음료를 마셨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락(酪)의 경우는 소와 양을 많이 키운 고구려 사람들이 많이 마셨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음료

1123년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 왕성 큰 길가에 10간 간격으로 큰 독에 백미장(白米漿)을 담아 놓고 길 가는 사람 누구나 마시게 하였는데, 이를 시수(施水)라 하며, 그것을 준비하여 왕성을 왕래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마실 수 있게 했는데, 신분의 차를 가리지 않았다. 스님이 이를 관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백미장은 흰 쌀을 푹 끓여 얻은 시큼한 맛의 발효 음료일 것이다. 같은 책에는 고려의 고관 귀족들은 목이 긴 병(提甁)에 숙수(熟水)를 담아 시종으로 하여금 들고 따르게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숙수 또한 고려 사람들이 마신 음료인데, 숭늉 등의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1313년 효가(曉可)란 승려는 스스로 깨우쳤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켰는데, 꿀물과 쌀가루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이것이 자신의 몸에서 나온 ‘감로사리(甘露舍利)’라고 속였으며, 사람들이 속아 그것을 마시거나 간직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색(李穡, 1328~1396) 또한 여름에 얼음 꿀물을 마시기도 했다. 고려에서는 해마다 여름철 종실과 높은 벼슬을 한 신하들에게 얼음덩이를 나누어 주었으므로, 귀족들은 얼음을 넣은 청량음료도 마셨던 것이다. 이색은 인삼탕을 뜨거운 화로로 끓여 먹기도 했다. 고려시대가 차 문화의 전성기이기는 했지만, 고려인들은 차 이외에도 여러 음료들을 마시기도 했던것이다.

 

다양한 음료가 발전한 조선

음료 문화는 그릇의 발전과도 관계가 깊다. 칠기(漆器), 도기(陶器) 등이 아직 널리 전파되지 못한 고조선과 삼국시대 초기는 음료문화가 발전하기 어려웠다. 고려는 차(茶) 문화가 크게 발달한 탓에 다른 음료가 많이 소비되지 못하였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차 소비가 줄면서, 다양한 음료가 발전하게 되었다. 흔히 인삼차,생강차 등 찻잎을 사용하지 않는 것임에도 ‘차’라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에 등장한 다양한 음료들이 차를 대신하였기에 불린 것이다. 인삼차는 인삼탕(湯)이라고 해야 옳다.

 

차를 대신한 음료로 등장한 것 가운데는 약재(藥材)나 식물의 꽃, 열매들을 이용한 것이 많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얻기 쉬운 재료로 음료를 만들었기에,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1) 수정과

1) 수정과

2) 식혜

2) 식혜

3) 오미자차 <출처: abex at Wikipedia.org>

3) 오미자차
<출처: abex at Wikipedia.org>

4) 계피차와 대추차 <출처: by LWY at Wikipedia.org>

4) 계피차와 대추차
<출처: by LWY at Wikipedia.org>

 

한국의 전통 음료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수정과와 식혜다. 수정과(水正果)는 생강과 계피를 달인 물에 곶감, 잣 등을 넣은 음료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본디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쓴 [산림경제(山林經濟)]에 등장하는 수정과 종류로는 매화(梅花)차,유자(柚子)차, 산사차(山査- 풀명자 나무 열매), 당귀(當歸)차, 오매(烏梅- 검은 매실)차 등이 있다. 매화꽃, 유자, 산사, 당귀싹, 매실가루에 꿀이나 잣을 섞어 만든 것을 모두 수정과라고 했던 것이다. 19세기말경에 만들어진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장미화채, 두견화채, 순채화채, 배화채, 앵두화채, 복분자화채, 봉숭아화채, 보리 수단 등 다양한 수정과류를 소개하고 있다. 궁중에서 마시는 수정과는 세면(細麵),화면(花麵), 수단(水團), 화채(花菜), 숙실과(熟實果) 등 그 종류가 더욱 다양했다.

 

수단(水團)은 멥쌀가루를 흰 떡에 쳐서 잘게 썬 것을 녹말가루를 묻혀 찬물에 헹구어 꿀이나 오미자물에 띄워 먹는 한국 고유의 화채를 말하기도 한다.

 

식혜(食醯)는 찹쌀을 쪄서 엿기름물을 붓고 삭힌 다음 밥알은 냉수에 헹구어 건져 놓고, 그 물에 설탕과 생강을 넣고 끓여 식힌 다음 밥알을 띄워 만든 것이다. 식혜는 기록상으로는 1740년경에 처음 등장한다. 엿기름을 부어 밥알이 삭도록 만든 식혜는 소화 작용을 도와 찰떡이나 고기와 같이 먹으면 좋은 음료다. 식혜는 일반 백성들이 즐기는 최상의 음료로 사랑을 받았다.

 

진달래 화채오미자국물에 녹말가루를 묻혀 데친 진달래꽃을 띄운 음료로, 봄에 주로 만들어 먹었다.

진달래 화채
오미자국물에 녹말가루를 묻혀 데친 진달래꽃을 띄운 음료로, 봄에 주로 만들어 먹었다.

보리수단삶은 보리에 녹말가루를 씌워 살짝 데친 것을 오미자국물에 잣과 함께 띄워내는 화채의 일종이다.

보리수단
삶은 보리에 녹말가루를 씌워 살짝 데친 것을 오미자국물에 잣과 함께 띄워내는 화채의 일종이다.

배숙통후추를 박은 배를 꿀물이나 설탕물에 끓여 식힌 것으로, 궁중에서 즐긴 귀한 음료다.

배숙
통후추를 박은 배를 꿀물이나 설탕물에 끓여 식힌 것으로, 궁중에서 즐긴 귀한 음료다.

 

빙허각 이씨(1759〜1824)가 저술한 생활 경제 백과사전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매화차, 포도차, 매실차, 국화차 만드는 법이 소개되고 있다. 또 진달래꽃을 꽃술 없이 물에 적셔 녹말을 고루 묻혀 삶아 오미자국에 잣과 띄워 만드는 화면(花麪), 시고 단단한 문배나무 열매 껍질을 벗겨 꿀물을 달게 타서 통후추와 생강을 넣고 불에 달인 후, 계피가루와 잣을 넣어 수정과를 만드는 향설고(香雪膏) 등 다양한 음료도 소개하고 있다.

 

임금이 마셨던 제호탕

제호탕(醍瑚湯)은 조선시대 임금들이 여름에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마시던 공식 음료라고 할 수 있다. 더위를 풀어내고, 열나고 목이 마르는 증상에 효과가 있다고 [동의보감(東醫寶鑑)]에도 실린 제호탕은 내의원에서 만들어 더위가 시작되는 매년 단오절에 임금께 올렸고, 임금은 이를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제호탕은 꿀 다섯 근과 오매육(烏梅肉- 아직 덜 읽은 푸른 매실의 과육을 벗겨 핵을 제거하고 연기에 건조시킨 것) 가루 1근, 백단향 5돈, 초과 1냥, 사인 5돈 등의 약재를 곱게 갈아 졸인 것을 찬물에 타먹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음료, 숭늉

제호탕, 인삼탕, 차 등은 조선시대 상류층이나 마실 수 있는 것이었다. 1916년 일본인 무라카미 유기츠(村上唯吉)에 의해 발간된 [조선인의 의식주]에는 “조선에서는 음료로 차를 마시는 경우는 없다. 인삼차는 상류 사람에 한하여 사용되며, 일반인은 숭늉과 물을 마신다.”고 했다. 백성들에게 가장 친근한 음료는 밥을 지은 솥에서 밥을 푼 뒤에 물을 붓고 데워 만든 구수한 숭늉이었다. 짜고 매운 음식을 먹는 한국인들의 입맛을 중화시켜주는 좋은 음료인 숭늉은 가장 대중적인 음료였다.

 

전통 음료에 대한 기대

술을 제외한 기호성 음료의 총칭을 음청류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음청류는 종류도 다양하고,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데다, 건강에도 좋은 장점들을 갖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커피, 탄산음료의 강한 맛에 밀려 잔치나 명절에나 먹는 음식, 특별한 곳에 가야만 먹는 음료가 되고 있다. 다행히 1993년 식혜가 캔 음료로 개발된 이후 전통음료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음료가 커피와 탄산음료 중심의 현 음료 소비문화에 변화를 가져오기를 기대해본다.

 


참고문헌: 김인락 외 공저, [한국한의학사 재정립], 한국한의학연구소, 1995; 이성우 저, [고대 한국식생활사연구], 향문사, 1992; 김상보 저,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 광문각, 1997;김상보 저,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가람기획, 2006;유애령 저,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교보문고, 1997;가사협 저, 윤서석 외 옮김, [제민요술-식품조리 가공편 연구], 민음사, 1993;빙허각 이씨 저, 정양완 역주, [규합총서], 보진재, 1975.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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