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구만들기/물과 우리

우물

지오마린 GeoMarine 2013. 4. 3. 18:21

우물_마을 생활의 중심이 되는 신성한 공간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물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갈증 해소, 요리, 씻기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은 물론이요, 농업, 목축 등의 생산 활동에 있어서도 물은 반드시 필요하다. 자연이 준 빗물과 강물에 의존하는 것보다 안정적으로 물을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각종 수리사업을 벌였다. 이 가운데 지하수를 퍼 올려 사용하기 위해 만든 우물은 많은 신화와 역사를 간직한 곳이었다.

우리나라의 우물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우물 유적은 중국 절강성 하모도(河姆渡) 유적 2문화층에서 발굴된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6천 년 전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3천 년대의 중동 지역에서도 우물이 만들어졌다. 비교적 강수량이 적은 중동과 지중해 연안에서는 우물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아, 강과 저수지 등의 수원지에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가 활발했다.

우리나라는 연간 강수량이 1,245㎜ 정도로 세계평균인 880㎜보다 많은 나라다. 하지만 강수량의 2/3가 여름철에 집중되어 물이 빠르게 유실되는 까닭에, 겨울이나 봄에 가뭄이 드는 경우도 많다. 또한 유목민처럼 물을 적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논농사를 짓는 등 물 소비량 또한 많았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물을 확보하는 일이 몹시 중요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비가 많이 오는 편이어서 곳곳에서 지하수가 샘솟아 우물을 만들기에는 조건이 좋은 편이다. 천연의 샘이 많은 만큼, 로마처럼 수원(水源)에서 도시로 물을 끌어오는 대규모 수로 공사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농사를 짓기 위해 강과 저수지의 물을 논과 밭으로 끌어오는 정도의 공사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식수와 생활용수의 대부분은 우물에 의지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청동기 시대 유적인 대구 동천동과 논산 마전리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신석기 시대의 우물은 아직 발견된 바가 없으나, 삼국시대와 그 이후에 만들어진 우물은 곳곳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우물 만들기


우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입지를 선정하고, 땅을 파는 굴착작업을 해야 한다. 이때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보통 지하수가 나오는 곳까지 파기 때문에 깊이는 일정하지 않다. 대구 동천동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우물 4기의 깊이는 51〜63㎝ 정도로 대체로 낮다. 하지만 평양시 고산동 우물(고구려)은 7.5m,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우물(신라)은 깊이 10m, 부여 궁남지 우물(백제)은 깊이 6m 이상이며, 서울 종묘 어정(조선)은 깊이가 8m 정도다.

안악3호분 벽화에 그려진 우물. 우물틀이 있고, 용두레가 설치된 고구려의 우물이다.

안악3호분 벽화에 그려진 우물. 우물틀이 있고, 용두레가 설치된 고구려의 우물이다.


굴착이 끝나면 굴 안에 벽시설을 쌓기 위해 먼저 바닥면에 시설을 만든다. 잔자갈을 깔거나 모래를 까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벽에 돌을 쌓고 빈틈에는 작은 자갈 등을 채우거나 점토를 발라 방수를 하기도 한다. 주로 돌을 사용해 만들지만, 나무도 이용한다. 고산동 우물의 경우는 제일 아랫단에 기초 대신에 우물 바닥의 암반 위에 통나무로 50㎝ 높이의 귀틀을 네모나게 짜서 놓은 다음 170㎝ 높이까지는 사각으로 벽을 쌓았다. 한 변의 길이는 115㎝ 정도다. 그 위 부분은 8각으로, 그 다음은 원통형으로 구간에 따라 형태를 다르게 했는데, 우물의 견고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삼국시대 우물의 지상부분은 안악3호분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림 속 우물에는 井자 모양의 우물틀이 있으며, 용두레가 설비되어 있다. 도르래를 이용해 물을 쉽게 기를 수 있게 만든 우물이다. 여자 두 명과 4개의 항아리와 단지, 그리고 말구유도 보인다. 신라의 우물에는 우물틀이 거의 없이 그저 50cm 이하의 낮은 턱만을 붙인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김홍도가 그린 풍속도에 그려진 우물이나, 창경궁 우물의 대부분에도 우물틀이 없다. 하지만 우물에 아이가 빠지거나, 홍수로 인해 빗물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덮개를 덮거나, 지붕을 만들어 놓은 경우도 많다. 우물의 부속시설로는 물을 버리기 위해 배수시설을 설치하거나, 물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물 주변에 돌을 깐 부석시설 등이 있으며, 우물물을 기르기에 좋도록 우물 윗부분 주변에 디딤돌을 놓기도 한다.

 

우물은 마을과 도시의 중심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지을 때 식수 확보가 용이한가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그래서 우물을 파고, 그 주변에 집을 지었다. 우물은 각 가정마다 갖추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가구가 공동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1415년 태종 임금은 도성에 가뭄이 들어 물이 부족해진 백성들이 매우 고생을 하자, 도성 안 5가구마다 우물 하나씩을 공동으로 파도록 명령했다. 이 때 도성 안에 많은 우물이 생겨나 사람들의 생활이 편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곳곳에 지하수가 있어 우물을 만들기가 쉬웠다. 경복궁 안에는 본래 24개의 우물이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우물이 마르거나 없어서 식수 확보가 어려운 경우에는 마을을 옮기기도 했다. 1421년 경상도 관찰사가 기장현(機張縣)에 우물물이 없으니, 현청 관아를 박곡리로 옮기고자 한다고 임금에게 청하였다. 관아가 있는 마을이나 성(城)에 샘이나 우물이 없으면, 관아와 주민을 옮기겠다는 상소는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이처럼 마을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식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동대문운동장 터를 발굴하면서 나온 동대문 우물. 도성 안에는 식수와 생활용수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우물이 있었다.

동대문운동장 터를 발굴하면서 나온 동대문 우물. 도성 안에는 식수와 생활용수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을 뜻하는 ‘정(井)’과 시장을 뜻하는 ‘시(市)’가 결합된 ‘시정(市井)’이란 말은 “인가(人家)가 모인 거리,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란 의미를 갖는다. 공동우물을 이용하기 위해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서 우물이 마을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곳은 사람이 모인 만큼, 물물교환과 교역이 시작될 수 있었다. 우물물은 모든 것을 씻겨주는 정화 작용도 한다. 외지에서 가져온 교역품이 마을에 들어올 때 정화의식, 또는 세정(洗淨)의 과정을 거쳤던 전통 때문에 시정이란 말이 생겼다는 견해도 있다. 우물가는 아낙네들이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고,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낙네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해 마시고 가는 곳이기도 했다. 우물은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이자, 마을의 중심이었다.

 

생명력을 가진 우물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났다는 알영정 우물.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신라오릉 내 숭덕전 뒤편에 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났다는 알영정 우물.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신라오릉 내 숭덕전 뒤편에 있다.

신라 장군 김유신의 집에 있던 우물 재매정.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든 우물로,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 위치한다. 사적 제 246호.

신라 장군 김유신의 집에 있던 우물 재매정.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든 우물로,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 위치한다. 사적 제 246호.

 

우리나라 우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의 건국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강과 산이 관련된 반면, 신라의 건국신화는 우물과 관련이 깊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양산 기슭의 나정(蘿井) 옆 숲 속에 놓여진 금궤 안에서 발견되었고, 그의 부인인 알영은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난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이렇듯 우물이 건국 신화와 관련된 것은 우물이 가진 생명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지 않는 우물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물의 힘을 가진 신성한 인물이 건국의 영웅으로 추앙된 것이라고 하겠다.

우물의 신 용왕


[삼국사기] 등에는 우물에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 여기서의 용은 물을 다스리는 용왕으로 표현되고, 용왕이 사는 용궁으로 가는 입구로 우물이 언급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명랑(明朗) 법사는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배우고, 자기 집 우물에서 솟아나왔다’고 하였다. 고려 건국신화에는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용녀(龍女)와 혼인한 사연이 전하는데, 서해 용왕의 딸인 용녀가 개성 동북쪽 산기슭에 땅을 파고 은그릇으로 물을 떴는데, 개성의 큰 우물(大井)이 그것이라고 한다. 또한 용녀는 우물을 통해 서해 용궁을 다녔다고 한다.

 

우물 제사

우물을 용왕이 머무는 곳이라고 여겼던 만큼, 사람들은 우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맑은 물이 마르지 않고 솟아나야 물을 먹는 사람들이 탈이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가뭄이 들어 물이 귀할 때, 매년 우물을 수리할 때에 우물에서 제사를 지냈다.


우물에 대한 제사는 국가가 지내는 제사에 포함되었다. 사해(四海), 대천(大川), 연못과 더불어 우물과 샘(井泉)에서도 제사를 올려야 했다. 신라에서는 시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신궁(神宮)이 나정(蘿井)에 세워졌다고 보기도 한다. 개성에는 고려의 대정묘(大井廟)가 있었는데, 1437년 조선에서는 이곳에서 음사(淫祀- 부정한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행하고 있으니, 차라리 우물가와 가까운 땅을 택해 단을 설치하고 대정지신에게 제사를 행하자고 예조(禮曹)에서 건의하기도 했다.


종묘 어정. 유일하게 서울 4대문 안에 보존되어 있는 우물로, 조선의 역대 왕들이 종묘를 왕래하면서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하여 ‘어정(御井)’이라 부른다.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른 적이 없어 주민들이 용왕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종묘 어정. 유일하게 서울 4대문 안에 보존되어 있는 우물로, 조선의 역대 왕들이 종묘를 왕래하면서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하여 ‘어정(御井)’이라 부른다.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른 적이 없어 주민들이 용왕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우물에 대한 제사는 세계 보편적인 현상이다. 고대 로마에서 10월 13일에 열린 폰티날리아 축제는 샘과 우물의 신에게 경배하는 감사제였다. 바빌로니아 신화에 등장하는 이슈타르 신, 켈트족이 섬긴 디아나 여신 등 세계 곳곳에서는 우물의 신을 풍요의 신으로 섬기기도 했다. 더불어 비를 내리게 해달라는 기우제를 우물가에서 지내기도 했다.

우물 속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들


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에서 2000년에 발굴을 시작한 9세기 통일신라 우물에서는 8〜9세로 추정되는 아이의 유골과 소, 개, 고양이를 비롯해 멧돼지, 오리, 뱀, 개구리, 상어 등 각종 동물 뼈 2,200여 점, 유골 주변에 가지런히 놓인 나무 두레박과 토기 70여 점, 기와, 목제품, 비녀, 허리띠를 포함한 금속제품 등의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발견된 아이 유골의 경우 아이가 단순히 우물에 빠진 것이 아니라, 왕실 차원에서 이곳에서 우물 제사를 지내며 사람을 공양품으로 바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경당지구 206호에서 발견된 우물의 경우에도 우물 바닥에 200점이 넘는 토기류를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이곳 역시 우물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런 우물들은 식수를 얻기 위한 곳이 아니라, 제사를 위해 쓰인 곳이다. 제사를 지낸 흔적이 남아있는 우물은 이외에도 논산 마전리 우물 등 여러 곳이 있다.

우물물이 변하지 않기를 바란 사람들


우물 제사는 개인과 마을에서도 이루어졌다. 집 안에 있는 우물은 집안 지킴이로서 성주신(成主神- 가내의 평안을 주관하는 신), 조왕신(竈王神- 부엌을 맡고 있는 신), 문신(門神), 측간신(厠間神) 등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반드시 우물의 신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마을 공동의 우물의 경우 대동굿을 할 때에 반드시 우물고사도 함께 올린다. 우물고사를 지내기 전에는 우물 주변의 잡스런 오물을 제거하고, 지붕을 씌우거나 금줄을 치기도 한다. 우물고사는 매년 정해진 날에 하거나, 여름철 홍수로 더렵혀진 우물을 청소한 후 소나 돼지를 잡아서 성대하게 우물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사람들은 우물이 변하지 않고, 늘 맑고 깨끗할 것을 기원했다.

고사에 따르면 신라 김유신 장군은 전장으로 떠나 있다가 오랜만에 집에 와서는 우물물의 맛이 변하지 않은 것을 보고 집안이 무탈하다고 여겨 다시 출정 했다고 한다. 백제가 망할 때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거나, 이차돈이 순교할 때 우물이 말랐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은 우물에 이상이 생기면 곧 큰 일이 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라져가는 우물


우물은 생명, 정화(淨化), 부활(復活), 농경(農耕), 왕권(王權) 등의 상징성을 가진 곳으로, 마을의 중심공간이며, 함부로 오염시켜서는 안 되는 성스러운 곳이기도 했다. 우물은 사람들이 만나 물자를 교환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마을 생활의 중심공간이었다. 공동우물의 물을 함께 마시는 사람들끼리는 두레패를 결성하여 공동노동을 하며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우물은 20세기 이후 상수도의 보급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게다가 각종 오염물질의 증가로 더럽혀져, 식수로도 사용할 수 없는 우물이 많아지고 있다. 옛날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국가의 위기로 볼만한 일이 생긴 것이다. 오늘날에는 각 가정마다 수도가 있어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을 함께 만나는 일도 차츰 옛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참고문헌: 경주박물관, [우물에 빠진 통일신라 동물들], 2011;권오영, [성스러운 우물의 제사- 풍납토성 경당지구 206호 유구의 성격을 중심으로], [지방사와 지방문화] 11권 2호, 2008;김광언, [한중일 세나라의 민속 연구- 샘과 우물], [민속학연구] 18호, 2001;김사봉, [고산동의 고구려우물], [조선고고연구] 1986년 1호, 사화과학원고고학연구소, 1986;김창억, 김대덕, 도영아, [우물유구에 대한 분석과 조사방법], [야외고고학] 5집, 2008; 알레브 라이틀 크루티어 지음, [물의 역사], 예문, 1997; 이성원, [고대 중국의 ‘市井’과 그 공간], [한국중국학회] 58집, 2008; 이신효, [백제 우물 연구], [호남고고학보] 20집, 2004; 이필영, [마을 신앙의 사회사], 웅진출판, 1994.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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