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궁에는 임금의 자문기관인 홍문관, 궁궐의 살림을 담당하는 상서원, 왕명을 받드는 승정원, 왕에게 진언을 올리는 사간원, 왕의 칙령을 기록하는 한림원같이 왕을 보좌하는 주요 국정기관이 들어섰다. 또한 궁궐문을 지키는 수문장청, 병조대신들이 회의를 하는 병조빈청, 국방과 무기관련 관청까지 들어섰고, 수라간, 옷을 만드는 상의원, 임금과 함께 온천에 온 종친들을 위한 종친부 건물도 있었다. 그러나 온양 행궁에서 가장 특징적인 건물은 임금이 정치를 하는 정전 바로 옆에 세워진 온천이었다. 조선의 임금 가운데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그리고 사도세자 등이 온양 행궁을 다녀왔다. 이들은 온양 행궁에 평균 35일 정도 머물렀다. 현대인들은 휴양을 위해 온천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예전에는 치료가 우선이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온천수는 힘줄과 뼈가 오므라든 경우, 특히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온천을 방문한 사람들은 창종(瘡腫- 헐은 곳이 생겨 부은 것), 습양(濕瘍- 피부 짓무름), 종기(腫氣- 부스럼), 안질(眼疾), 풍질(風疾) 등으로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다. 임금이 목욕을 할 때에는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해 온천물에 부용향, 소목, 울금, 작설 등의 약재를 넣기도 했다. 임금의 온천욕 모습 ![](http://ncc.phinf.naver.net/ncc01/2011/9/8/29/10px.jpg) 목욕은 놋으로 만든 큰 목욕통을 사용했고, 탕실 좌우로는 온돌방과 시원하게 앉아 바람을 쐴 수 있는 량방 2개가 양쪽에 있었다. 탕실은 물이 흐르는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한번 사용한 하수는 지하 배수시설을 통해 흘러가게 만들었다. 이층 나무다리를 건너 탕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도 있었다. 온천 건물은 약 30평 정도의 규모였고, 탕실은 10평 정도로 2개 탕이 있었다. 하나는 온천수가 솟는 곳이고, 한곳에는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식힌 온천수가 채워져 있었다. 탕 부근에는 모두 돗자리가 깔려 있어 왕의 몸에 돌이 닿지 않도록 했다. 또 열두 폭짜리 푸른 목면 90척으로 휘장을 쳐두었다. 벽은 판자벽을 대고 도배를 해 습기가 차지 않게 했다.
목욕을 위한 용품에는 오동나무 바가지, 옻칠한 소반, 조그만 물바가지, 놋대야, 의자, 수건 14장, 자주색 비단에 솜을 넣어 만든 목욕가운 등이 있었다. 임금의 경우는 옷을 다 벗지 않고, 유모나 나이 많은 상궁이 몸을 씻겨 주었다. 임금의 목욕은 백성들의 고통 ![](http://ncc.phinf.naver.net/ncc01/2011/9/8/29/10px.jpg) 임금이 온천행을 하면 장기간 궁궐을 비우게 된다. 따라서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의 정치구조에서는 임금의 온천행에 맞추어 관리와 호위 군사들, 내시와 궁녀 등 많게는 수천 명이 함께 이동해야 했다. 이들의 온천행에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다. 조선은 한강에 다리를 놓지 않았고, 길도 제대로 정비하지 않았으며, 온양 행궁은 임금이 다녀간 뒤에는 방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임금의 온천행이 결정되면 한강을 건널 때 부교 등을 설치해야 하고, 길을 정비해야 했으며, 온양 행궁을 수리하는 데에도 많은 비용이 들었다. 이를 위해서는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다. 때문에 민가와 농경지가 훼손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농번기에 온천행이 이루어지면 농민들은 그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었다. 왕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고을마다 왕의 식사에 올릴 음식(御膳)을 마련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특히 많은 이들이 갑자기 머물게 되는 온양지역 백성들은 고통이 심했다. 따라서 왕은 백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음식과 술을 하사하거나, 세금을 경감시켜 주거나, 온천 주변 사람들에게만 특별히 과거를 볼 수 있는 특혜를 주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온천이 있는 곳의 수령은 온천의 욕장을 수리ㆍ관리하고 병인을 구호해야 한다.”라고 법으로 정하고 있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동래현온정(東萊縣溫井)’이란 시에서 “태수는 온천을 수리하지 마소, 백성들만 괴롭힐까 염려스럽소.”라고 읊은 바 있는데, 이는 온천이 백성들에게 짐이 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는 “옛 서적에 수주(樹州:경기도 부평)에 온천이 있다고 하여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답사를 해도 온천을 찾아내지 못했는데, 이것이 혹 사람들이 온천을 싫어하여 그 근원을 막아버린 것은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글이 있기도 하다. 온천욕을 구실로 낙향한 관리들 ![](http://ncc.phinf.naver.net/ncc01/2011/9/8/29/10px.jpg) 조선의 관리들은 나이 들어 병이 깊어지면 온천욕을 통해 치유하고자 했다. 관직에서 사임하고자 할 경우 쉽게 왕이 허락하지 않지만, 온천욕을 위해 낙향하고자 할 경우에는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습양(濕瘍) 증세를 앓고 있던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인 최립(崔笠, 1539〜1612)을 비롯해, 호조 참판으로 1542년 사직을 청한 이현보(李賢輔 : 1467~1555),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1539~1609)등 많은 이들이 온천욕을 위해 사직을 하였다.
1421년 세종은 휴가를 얻어 평산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신하인 허지(許遲):1372〜1422)에게 약을 내려 주고, 황해도 감사에게 술과 음식물을 공급해주었다. 관리들이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하는 경우, 국가에서 특별히 배려를 해주기도 했던 것이다. 선조의 3째 딸의 남편이었던 부마도위 신익성(申翊聖)은 온양온천에 가서 특별한 대접을 받았는데, 그가 목욕한 곳은 이후 다른 이들에게 금지(禁地)가 되기도 했다. 일반인의 온천욕 ![](http://ncc.phinf.naver.net/ncc01/2011/9/8/29/10px.jpg) 온천은 임금과 고위 관리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사용이 가능했다. 1419년 5월 세종은 온천욕을 하다가 목욕하는 병자들을 보고 쌀과 소금과 장을 나눠주기도 했다. 세종은 남자와 부녀자들이 모두 목욕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성종 역시 충청도 관찰사에게 명을 내려 온양 온천에서 왕실이 사용하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 목욕하는 것을 허락하고, 또 남쪽 온천에서는 재상 및 사족의 부녀에게 목욕하는 것을 허락하라고 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약천집((藥泉集)]에 실린 ‘온양온천 북탕기(溫陽溫泉北湯記)’에는 그가 두풍(頭風 - 머리가 늘 아프고 또는 자꾸 부스럼이 나는 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1660년에 온양온천에 가서 본 모습을 적고 있다. 이 글에 따르면 당시의 온양 행궁은 오래도록 임금이 방문하지 않아 담장이 무너지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행궁은 임금이 머물지 않으면 사용처가 없으므로, 임금이 방문할 때마다 새로 수리해야 하는 비용이 늘 소비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온양온천은 온천의 수맥을 끌어다가 남탕(南湯)과 북탕(北湯)을 만들어, 남탕은 일반인이 목욕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북탕은 돌을 다듬은 정교함과 아름다움이 남탕보다 나았지만, 부마도위의 방문 이후 금지(禁地)가 되어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남구만은 임금이 사용했던 곳도 일반인에게 개방된 만큼, 북탕을 금지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하늘이 온천을 빚어내어 만백성의 병을 제거하도록 한 만큼, 남자는 남탕에서 목욕하고 여자는 북탕에서 목욕하도록 북탕을 일반인에게 개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