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구만들기/물과 우리

온천

지오마린 GeoMarine 2013. 4. 3. 18:22

온천_목욕 풍속에서 치유와 휴양까지

온천은 땅에서 쏟아져 나오는 지하수로, 섭씨 20〜25도 이상의 온수를 말하며, 물리적, 화학적으로 보통의 물과는 성질이 다른 천연의 특수한 물이다. 세계 각지에서 인류는 오래전부터 온천욕을 즐겨왔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온천을 언제부터 어떻게 이용했을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고대의 온천


우리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온천은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천왕(고구려 제13대 왕) 17년(286년) 왕의 동생인 일우와 소발 등이 반란을 꿈꾸며 거짓으로 병을 칭하면서, 온탕에 가서 무리들과 더불어 오락을 즐기며 함부로 반역을 꿈꾸는 말을 했다. 왕은 이들을 거짓으로 국상으로 삼을 듯이 하면서 부른 후, 힘센 자들을 보내 잡아 죽였다.”

이 기록에서 일우와 소발 일행이 온천에 간 이유는 자신의 무리들과 반란을 위한 단합대회 같은 것을 하기 위함이었지만, 온천행을 핑계 삼은 이유가 병을 치유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온천을 찾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온천욕(溫泉浴)이 병 치료에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온천은 치료 외에도 휴식, 스포츠, 사교 등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온천에 한번 목욕을 한다고 병이 금세 호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장기간 숙식을 하며 온천 주변에 머물러야 한다. 따라서 왕과 귀족들이 온천에 머물며 치료와 휴식을 취하는 동안, 사냥 등의 스포츠 행사가 열리기도 했고 이를 통해 사교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온천을 가장 즐겨 찾는 이들은 왕이었다. 기록상 가장 먼저 온천을 이용한 임금은 712년 4월 온천에 간 신라 성덕왕(신라 제33대 왕)이다. [삼국유사]의 ‘영취사(靈鷲寺)’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 31대 신문왕 때인 683년에 재상 충원(忠元)이 장산국(萇山國:부산 동래구) 온천에서 목욕을 마치고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영취산 일대에서 기연(機緣)을 맺어 영취사를 짓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충원이 들린 온천은 동래 온천이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백제 시대 탕정군(湯井郡)이 등장하는데, 이는 신라의 온수군(溫水郡)으로 현재의 온양지역을 의미한다. ‘탕정’이란 말이 끓는 우물, 즉 온천을 의미하는 것으로 백제 시대에 이미 온양의 온천이 알려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 온천


고려의 임금들은 온천에 자주 행차를 했었다. 문종을 비롯한 고려 임금들이 자주 다닌 온천은 황해도 평산군에 위치한 평주(平州) 온천이다. 가장 많이 온천에 다녀온 임금은 충렬왕인데, 1287년 그는 온천에 머물면서 박지량 장군에게 군사 1천을 동쪽 국경에 주둔시켜 여진을 방비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고, 그곳에서 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그는 왕비인 원나라 공주와 함께 온천에 머물기도 했다. 온천 여행은 언제나 많은 비용이 들었다. 1285년 왕이 공주, 세자와 함께 평주 온천에서 사냥을 했는데, 음식을 마련하는 비용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목종(998〜1009)은 문하시중 한언공(韓彦恭)이 병이 나자, 의원과 약물, 수레 등을 내려주며 온천에 가서 병 치료를 하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선종(1083〜1094)은 보다 적극적으로 “병든 부모께 온천치료를 시키고자 하는 관리에게는 온천의 거리에 따라 휴가제를 실시하라.”고 명을 내리기도 했다. 임금만이 아니라, 신하들도 온천을 치료 행위로 이용했던 것이다.


고려 시대 기록에 등장하는 온천은 동래, 유성, 온양, 영산(부곡), 평해, 백천, 이천, 고성, 신주, 성주 온천 등이 있다.

조선시대 온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황해도 평산의 평주 온천을 즐겨 찾았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하들은 한양과 300리나 떨어진 평주 온천행을 자제할 것을 청했지만, 태조는 신하들이 자신의 병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당시 [세종실록지리지 ]에 언급된 온천의 수는 전국에 31개나 된다. 수안보, 평산, 덕산, 온양, 유성, 동래, 마금산, 백천, 송화온천 등이다. 그런데 경기도와 전라도 지역에는 온천이 없었다. 한양에서 가까운 곳에 온천이 없었기에, 온천에 가는 비용과 시간은 자연스레 많이 들었다. 경기 지역에서 온천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약속하기도 했지만, 찾지 못하였다. 조선의 임금들이 가장 많이 찾은 온천은 충청도 온양이었다. 온양 온천은 백제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더욱 유명해진 것은 조선시대 온양에 임금이 머무는 행궁(行宮- 임금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에 임시로 머물던 별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온양은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온천으로 세종을 비롯해 세조, 현종, 숙종, 영조, 사도세자 등 여러 임금이 이곳에 행궁을 짓고 휴양이나 병의 치료 차 머무르며 정사를 돌보았다. 위의 온양행궁도를 통해 당시 온천행의 규모 및 임시 궁궐의 배치를 알 수 있다.

온양은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온천으로 세종을 비롯해 세조, 현종, 숙종, 영조, 사도세자 등 여러 임금이 이곳에 행궁을 짓고 휴양이나 병의 치료 차 머무르며 정사를 돌보았다. 위의 온양행궁도를 통해 당시 온천행의 규모 및 임시 궁궐의 배치를 알 수 있다.

행궁에는 임금의 자문기관인 홍문관, 궁궐의 살림을 담당하는 상서원, 왕명을 받드는 승정원, 왕에게 진언을 올리는 사간원, 왕의 칙령을 기록하는 한림원같이 왕을 보좌하는 주요 국정기관이 들어섰다. 또한 궁궐문을 지키는 수문장청, 병조대신들이 회의를 하는 병조빈청, 국방과 무기관련 관청까지 들어섰고, 수라간, 옷을 만드는 상의원, 임금과 함께 온천에 온 종친들을 위한 종친부 건물도 있었다. 그러나 온양 행궁에서 가장 특징적인 건물은 임금이 정치를 하는 정전 바로 옆에 세워진 온천이었다.

조선의 임금 가운데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그리고 사도세자 등이 온양 행궁을 다녀왔다. 이들은 온양 행궁에 평균 35일 정도 머물렀다. 현대인들은 휴양을 위해 온천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예전에는 치료가 우선이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온천수는 힘줄과 뼈가 오므라든 경우, 특히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온천을 방문한 사람들은 창종(瘡腫- 헐은 곳이 생겨 부은 것), 습양(濕瘍- 피부 짓무름), 종기(腫氣- 부스럼), 안질(眼疾), 풍질(風疾) 등으로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다. 임금이 목욕을 할 때에는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해 온천물에 부용향, 소목, 울금, 작설 등의 약재를 넣기도 했다.

임금의 온천욕 모습


목욕은 놋으로 만든 큰 목욕통을 사용했고, 탕실 좌우로는 온돌방과 시원하게 앉아 바람을 쐴 수 있는 량방 2개가 양쪽에 있었다. 탕실은 물이 흐르는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한번 사용한 하수는 지하 배수시설을 통해 흘러가게 만들었다. 이층 나무다리를 건너 탕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도 있었다. 온천 건물은 약 30평 정도의 규모였고, 탕실은 10평 정도로 2개 탕이 있었다. 하나는 온천수가 솟는 곳이고, 한곳에는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식힌 온천수가 채워져 있었다. 탕 부근에는 모두 돗자리가 깔려 있어 왕의 몸에 돌이 닿지 않도록 했다. 또 열두 폭짜리 푸른 목면 90척으로 휘장을 쳐두었다. 벽은 판자벽을 대고 도배를 해 습기가 차지 않게 했다.

목욕을 위한 용품에는 오동나무 바가지, 옻칠한 소반, 조그만 물바가지, 놋대야, 의자, 수건 14장, 자주색 비단에 솜을 넣어 만든 목욕가운 등이 있었다. 임금의 경우는 옷을 다 벗지 않고, 유모나 나이 많은 상궁이 몸을 씻겨 주었다.

임금의 목욕은 백성들의 고통


임금이 온천행을 하면 장기간 궁궐을 비우게 된다. 따라서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의 정치구조에서는 임금의 온천행에 맞추어 관리와 호위 군사들, 내시와 궁녀 등 많게는 수천 명이 함께 이동해야 했다. 이들의 온천행에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다. 조선은 한강에 다리를 놓지 않았고, 길도 제대로 정비하지 않았으며, 온양 행궁은 임금이 다녀간 뒤에는 방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임금의 온천행이 결정되면 한강을 건널 때 부교 등을 설치해야 하고, 길을 정비해야 했으며, 온양 행궁을 수리하는 데에도 많은 비용이 들었다. 이를 위해서는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다. 때문에 민가와 농경지가 훼손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농번기에 온천행이 이루어지면 농민들은 그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었다. 왕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고을마다 왕의 식사에 올릴 음식(御膳)을 마련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특히 많은 이들이 갑자기 머물게 되는 온양지역 백성들은 고통이 심했다. 따라서 왕은 백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음식과 술을 하사하거나, 세금을 경감시켜 주거나, 온천 주변 사람들에게만 특별히 과거를 볼 수 있는 특혜를 주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온천이 있는 곳의 수령은 온천의 욕장을 수리ㆍ관리하고 병인을 구호해야 한다.”라고 법으로 정하고 있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동래현온정(東萊縣溫井)’이란 시에서 “태수는 온천을 수리하지 마소, 백성들만 괴롭힐까 염려스럽소.”라고 읊은 바 있는데, 이는 온천이 백성들에게 짐이 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는 “옛 서적에 수주(樹州:경기도 부평)에 온천이 있다고 하여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답사를 해도 온천을 찾아내지 못했는데, 이것이 혹 사람들이 온천을 싫어하여 그 근원을 막아버린 것은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글이 있기도 하다.

온천욕을 구실로 낙향한 관리들


조선의 관리들은 나이 들어 병이 깊어지면 온천욕을 통해 치유하고자 했다. 관직에서 사임하고자 할 경우 쉽게 왕이 허락하지 않지만, 온천욕을 위해 낙향하고자 할 경우에는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습양(濕瘍) 증세를 앓고 있던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인 최립(崔笠, 1539〜1612)을 비롯해, 호조 참판으로 1542년 사직을 청한 이현보(李賢輔 : 1467~1555),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1539~1609)등 많은 이들이 온천욕을 위해 사직을 하였다.

1421년 세종은 휴가를 얻어 평산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신하인 허지(許遲):1372〜1422)에게 약을 내려 주고, 황해도 감사에게 술과 음식물을 공급해주었다. 관리들이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하는 경우, 국가에서 특별히 배려를 해주기도 했던 것이다. 선조의 3째 딸의 남편이었던 부마도위 신익성(申翊聖)은 온양온천에 가서 특별한 대접을 받았는데, 그가 목욕한 곳은 이후 다른 이들에게 금지(禁地)가 되기도 했다.

일반인의 온천욕


온천은 임금과 고위 관리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사용이 가능했다. 1419년 5월 세종은 온천욕을 하다가 목욕하는 병자들을 보고 쌀과 소금과 장을 나눠주기도 했다. 세종은 남자와 부녀자들이 모두 목욕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성종 역시 충청도 관찰사에게 명을 내려 온양 온천에서 왕실이 사용하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 목욕하는 것을 허락하고, 또 남쪽 온천에서는 재상 및 사족의 부녀에게 목욕하는 것을 허락하라고 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약천집((藥泉集)]에 실린 ‘온양온천 북탕기(溫陽溫泉北湯記)’에는 그가 두풍(頭風 - 머리가 늘 아프고 또는 자꾸 부스럼이 나는 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1660년에 온양온천에 가서 본 모습을 적고 있다. 이 글에 따르면 당시의 온양 행궁은 오래도록 임금이 방문하지 않아 담장이 무너지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행궁은 임금이 머물지 않으면 사용처가 없으므로, 임금이 방문할 때마다 새로 수리해야 하는 비용이 늘 소비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온양온천은 온천의 수맥을 끌어다가 남탕(南湯)과 북탕(北湯)을 만들어, 남탕은 일반인이 목욕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북탕은 돌을 다듬은 정교함과 아름다움이 남탕보다 나았지만, 부마도위의 방문 이후 금지(禁地)가 되어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남구만은 임금이 사용했던 곳도 일반인에게 개방된 만큼, 북탕을 금지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하늘이 온천을 빚어내어 만백성의 병을 제거하도록 한 만큼, 남자는 남탕에서 목욕하고 여자는 북탕에서 목욕하도록 북탕을 일반인에게 개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화가 기산 김준근은 19세기 후반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다룬 그림을 그린 풍속화가로 유명했다. 위 그림도 기산의 풍속화 중 한점으로 당시 한증막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 기산 김준근은 19세기 후반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다룬 그림을 그린 풍속화가로 유명했다. 위 그림도 기산의 풍속화 중 한점으로 당시 한증막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치료를 위해 온천 외에도 요즘의 사우나에 해당되는 한증(汗蒸)이 이용되기도 했다. 한증소는 스님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1427년에는 한증소를 관리하던 스님들이 세종에게 고해 쌀 50섬과 무명 50필을 받아서 그것으로 보(寶)를 삼아 그 이자로 가난한 병자들을 구제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가난한 이들은 한증소에 땔 나무를 구하지 못해 이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증소는 이용객이 많아 1429년 남자와 여자의 목욕실을 구분하는 공사가 이뤄지고, 이후 3곳이 더 지어지기도 했다.

19세기말 기산 김준근(金俊根)의 풍속도에는 한증막에 대한 그림이 남아있다. 이 그림을 통해 소나무를 욕실 중앙에서 연소시켜 밀폐된 공간을 가열하는 방식으로 한증막을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한증소처럼 온천욕을 하며 병치료를 하는 백성들은 대개는 무상으로, 또는 약간의 비용을 지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온천

온천은 자연이 빚어 인류에게 준 큰 선물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물 좋고 산 좋은 나라로 유명하며, 좋은 온천도 많다. 그런데 몇 년 전 무분별하게 온천을 개발해 문제가 된 바 있었다. 좋은 온천을 잘 관리하고, 훌륭한 온천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조선왕조실록];[연려실기술];[藥泉集];신병주,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KBS, [역사스페셜 58회. 온천궁궐, 온양행궁의 비밀], 2000년 2월 26일 방송;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溫幸 연구], [藏書閣] 제 9집, 2003;설혜심, [온천의 문화사], 한길사, 2001.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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