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구만들기/물과 우리

석빙고

지오마린 GeoMarine 2013. 4. 3. 18:23

석빙고_얼음을 넣어두던 창고

요즘은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어서, 얼음이나 찬 음료수를 넣어두고 수시로 꺼내먹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냉장고가 없던 옛날에는 더운 여름날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우리 조상들은 겨울에 얼음을 채취해서, 얼음 창고(氷庫)에 넣어두고 여름에 사용했었다.

얼음에 대한 인류의 욕망

인류가 인공적으로 얼음을 만들게 된 것은, 1876년 독일의 칼 린데가 암모니아를 냉각제로 사용하는 압축냉장장치를 발명한 이후부터였다. 1913년 최초의 가정용 전기냉장고가 미국에서 출시된 후부터 냉장고는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지만, 그 이전에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얼음은 천연 얼음뿐이었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더운 여름에도 얼음을 사용하기 위해 부단히 많은 노력을 해왔다. 얼음은 그만큼 귀중한 것이었고, 제사를 비롯한 행사 때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출처: gettyimages>

고대로부터 인간은 더운 여름에도 얼음을 사용하기 위해 부단히 많은 노력을 해왔다. 얼음은 그만큼 귀중한 것이었고, 제사를 비롯한 행사 때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출처: gettyimages>


더운 여름에 얼음을 사용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높은 산에서 가져온 눈을 뭉쳐 벽 사이에 넣은 다음, 짚이나 흙, 퇴비 등으로 열을 차단한 저장소를 만들어 포도주를 차게 보관하는데 사용한 적이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 네로 황제 등은 발이 빠른 사람들을 동원해서 높은 산의 눈을 날라 오게 하여, 전투나 격투에서의 승리자에게 찬 음식을 내려주기도 했다.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거대한 시장에서는 근처의 봉우리에서 운반해온 얼음을 팔기도 했다. 눈 덮인 산이나 겨울에나 볼 수 있는 얼음을 더운 여름에도 사용하기 위한 노력은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얼음을 인공적인 창고에 넣어 보관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B.C 1700년경, 시리아 남동부에 위치했던 마리의 군주 짐리림이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얼음집을 짓고 여기에 얼음을 넣은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중국도 오래전부터 얼음 창고를 사용했다. [시경(詩經)]의 <빈풍(豳風)> ‘칠월(七月)’ 편에는 다음 같은 구절이 있다.

“십이월이 되면 얼음을 탕탕 깨어 정월에는 빙고(凌陰)에 넣는다네.”

[시경]의 내용은 B.C 10세기경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이미 얼음 창고가 있어서 얼음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B.C 7∼5세기 무렵의 진(秦)나라의 얼음 창고 유적이 협서성 옹성(擁城)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B.C 3세기에 진시황(秦始皇)은 지하 17m에 거대한 토기 단지를 파묻어 빙고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송사(宋史)] <예지(禮志)>에는 신하들에게 여름에 얼음을 내려준 기록이 있고, [명사(明史)] <예지(禮志)>에는 겨울철에 얼음을 캐어 빙고에 넣었다가, 여름과 가을철 제사에 사용한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얼음은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 때나 사용할 수 있었다. 실생활에서 얼음을 가장 널리 사용한 것은 우리 조상들이었다.

뚜렷한 사계절, 얼음을 필요로 하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매우 뚜렷해, 겨울철에는 얼음이 얼고, 여름에는 몹시 덥다. 따라서 겨울에 얼음을 채취해, 잘 보관해 여름에 사용하려는 노력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삼국지(三國志)] <부여> 편의 기록에 따르면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 지낸다(其死, 夏月皆用氷)’고 했다.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얼음을 사용하는 일이 부여의 전체 백성이 아닌 왕과 귀족들에 한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위해서는 얼음이 대량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대량으로 여름까지 보관ㆍ관리하는 시설이 부여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서기 1세기 신라 3대 노례왕(유리왕, 24~57년)때 이미 얼음창고(氷庫)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에는 서기 505년 지증왕 6년 겨울에 해당 관서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토록 했다고 하고, 얼음 창고를 관리하는 빙고전(氷庫典)이란 관청을 두고 대사 1명, 사 1명의 관원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삼국유사]의 기록이 다소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신라에서 얼음 창고를 만들어 얼음을 이용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2010년 충남 연기군 남면 나성리 유적에서 서기 3〜4세기에 사용된 얼음창고를 발견했다는 발굴보고가 있었다. 나성리 유적에서 발견된 수혈유구(구덩이) 가운데 kk-014 수혈은 400×356㎝ 규모의 저장구덩이로 평면 원형의 형태로 바닥면 동쪽으로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배수로 내부에는 직경 10㎝ 내외의 작은 할석과 자갈돌이 채워져 있다. 발굴을 담당한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측은 이것이 창고형 구덩이 치고는 지하가 너무 넓고, 구덩이 밑으로 자갈이 깔린 배수로가 있는 데다, 인근에 금강이 위치한 점을 근거로 얼음창고라고 추정하였다. 이것이 백제시대 얼음창고로 최종 확인될 경우, 조선시대 빙고보다 천년 이상 앞선,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얼음창고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충남 공주 정지산 유적에서 조사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배수로가 딸린 수혈유구를 빙고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시대의 얼음창고의 모습은 [일본서기] 인덕천황 62년조(374년)에 나오는 빙실(氷室) 기록을 통해 상상해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빙실은 땅을 1장(1丈: 약 3m) 정도 파고, 구덩이 바닥에 이엉이나 억새를 깔고 그 위에 얼음을 두고 얼음 위에도 풀을 덮어놓는다.’고 되어있다.

고려시대에는 얼음을 나눠주는 반빙(頒氷) 제도가 정해져, 해마다 6월부터 8월초(입추)까지 벼슬에서 물러난 공신들에게는 3일에 한 번씩, 복야, 상서, 경, 감, 대장군 이상에는 7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누어주도록 제도화했다. 고려는 얼음을 채취할 때 사한제(司寒祭)라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얼음 창고는 왕실과 정부에서만 만든 것은 아니었다. 1244년 당시 최고 권력자 최이(崔怡)는 사사로이 얼음 캐어 서산(西山)의 빙고(氷庫)에 저장하려고 백성을 풀어서 얼음을 실어 나르도록 했다. 얼음에 대한 수요가 커지자, 고려 정부는 1298년 6월 누구나 얼음을 저장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도 했다.

조선의 얼음창고

1396년 조선의 수도 한양에 서빙고동빙고가 건설되었다. 동빙고에는 얼음 1만244정(丁), 서빙고에 13만4,974정을 보관했으므로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13배 이상의 얼음을 저장했다. 동빙고의 창고는 1동이었던 것에 비해 서빙고는 8동이었다. 동빙고는 음력 3월 1일부터 가을 상강(霜降)까지 왕실의 제사에 필요한 얼음을 공급했으며,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과 고급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창덕궁 안에는 별도로 내빙고를 두어 궁궐의 얼음 수요를 맡았다. 얼음 창고는 예조의 속아문에서 관장했다. 관원은 제조(提調) 1명과 종5품 별좌(別坐), 정6품 별제(別提), 종6품 별제, 정8품 별검(別檢), 종8품 별검, 서리를 4명씩 빙고에 나누어 배치하여, 빙고에서 얼음의 보관과 반출을 관장했다. 또 동빙고에 얼음을 저장할 때는 제향에 올리는 얼음을 담당하는 봉상시의 관원도 감독했다.


경주 석빙고의 모습.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의 서빙고와 동빙고 뿐 아니라 각 지방에도 얼음창고를 만들어 얼음을 저장했다

경주 석빙고의 모습.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의 서빙고와 동빙고 뿐 아니라 각 지방에도 얼음창고를 만들어 얼음을 저장했다

얼음의 채취


당시 깨끗한 얼음을 얻기 위해 지금의 뚝섬까지 가서 한강의 얼음을 채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얼음 채취는 매년 1월 소한과 대한 사이에 주로 이루어졌고, 얼음이 12㎝ 이상 얼었을 때 잘라내었다. 이 일은 군인들과 강촌 주민들이 국가의 부역으로 담당했다.

겨울에 얼음을 캐는 일은 매우 어려워, 동상에 걸리거나 빙판에 미끄러져 찰과상, 골절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겨울만 되면 빙고 부역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1423년 세종은 얼음을 캐고 저장하는 사람들(장빙고 역군)에게 술 830병, 어물 1,650마리를 하사하여 이들을 배려하기도 했다. 또 의원을 보내 얼음 캐는 군인의 동상을 치료한 기록도 있다.


캐낸 얼음은 가로 70〜80㎝, 세로 1m 이상이 되도록 일정한 규격으로 맞추어 톱으로 썬 후에, 우마차를 이용해 석빙고로 옮겼다. 석빙고에 도착한 얼음은 볏짚과 쌀겨 등으로 포장하여 층층이 쌓았다. 대개 1만 개 이상에서 13만개까지 쌓았다고 한다.

얼음의 사용


석빙고에 넣어둔 얼음은 양력 3월 말인 춘분(春分)일에 개빙제(開氷祭)를 열어 출하해 10월 상강에 그 해의 공급을 마감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의 ‘반빙(半氷)’ 조에는 얼음의 공급 및 사용처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해마다 여름철 끝달(음력 6월)에 여러 관사와 종친 및 문무관 중의 당상관(정3품 이상 관리), 내시부의 당상관, 70세 이상의 퇴직당상관에게 얼음을 나누어 준다. 또한 활인서의 병자들과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지급하도록 한다.”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리들이 얼음을 받을 자격이 있었고, 환자들과 죄수들의 건강을 위해 얼음이 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채수(1449〜1515)는 한여름에 갈증이 심해, 찬 소주를 많이 마시고 기절을 했다. 집안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통곡하자, 순식간에 그가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얼음을 깨어서 입에 넣자 날이 저문 후 채수가 깨어났다는 일화가 있다.

조선에는 종친들과 대신들, 각 관아에 나무로 만든 빙표(氷票)를 하사했다. 빙표를 장빙고에 가져가면 해당하는 만큼의 얼음을 내어주었다. 채수의 부인은 남편이 쓰러지자, 사람을 시켜 장빙고에 가서 얼음을 가져오게 하였을 것이다. 얼음을 내려주는 사빙(賜氷)은 고급 관직자에게 내려주는 특별한 혜택으로,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얼음은 탐나는 물건이다. 때문에 장빙고의 얼음은 도적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선조 18년(1585년) 8월에는 사헌부 정언 류덕수가 “서빙고의 얼음이 도둑까지 맞아 여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거의 다 써 버렸다.”고 하며 이조에게 특별히 조사하도록 아뢴 바도 있다. 얼음의 저장과 반출은 엄격히 규제됐다. 만약 얼음의 보관을 소홀히 하여 저장한 얼음이 녹아 없어지면 파면시키는 등 빙고의 얼음은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1454년 단종 2년에 사헌부에서는 ‘국가의 빙고에서 저장하는 얼음에 한도가 있어 신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수 없으므로 정1품에서 종4품의 대부(大父) 이상과 각사(各司)에서 얼음을 보관할 수 있게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얼음을 받은 개인도 단기간 얼음을 보관할 창고를 두고 제사 등에서 사용했다. 18세기 영·정조 시대 이후에는 물동량의 왕래가 많았던 한강변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생선 보관용 얼음을 공급하던 개인 빙고가 존재했다.

석빙고의 과학적 원리

경주 석빙고의 빙실 내부 모습.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의 경사로 인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경주 석빙고의 빙실 내부 모습.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의 경사로 인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현재 조선시대의 석빙고 가운데는 청도 석빙고(1713년), 현풍 석빙고(1730년), 안동 석빙고(1737년), 경주 석빙고(1738년), 창녕 석빙고(1742년), 영산 석빙고(18세기 후반) 그리고 해주 석빙고(1735년 개축)가 남아있다. 대개의 석빙고는 내부길이 12m, 폭 5m, 높이 5m 내외의, 빙실 공간의 절반은 지하에, 절반은 지상에 있는 구조가 대부분으로, 외형은 무덤처럼 보이나 내부는 돌로 만들어져 계단으로 통해 들어갈 수 있다. 큰 것은 평균아파트 규모인 30평이 넘는다. 석빙고는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천장을 아치형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 움푹 들어간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런 구조는 더운 공기를 밖으로 빼어 낼 수 있다. 차가운 공기는 내려가고, 더운 공기는 위로 뜨기 때문에, 0℃ 안팎의 온도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빗물을 막기 위해 석회암과 진흙으로 방수층을 만들었고, 얼음과 벽 및 천장 틈 사이에는 왕겨, 밀짚, 톱밥 등의 단열재를 채워 외부 열기를 차단했다. 빙고의 바닥은 흙으로 다지고 그 위에 넓은 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이 자연적으로 배수되도록 했다. 또 외부는 무덤처럼 만들어 잔디 같은 풀을 심어 햇빛을 반사하고, 풀에서 나온 습기로 석빙고의 온도를 낮추어 주었다. 또 2-3곳의 환기구를 만들어 외부 공기와 통할 수 있게 했다.

석빙고는 과학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공으로 얼음이 만드는 시설이 아니라, 온도를 낮게 해서 자연의 얼음을 녹지 않게 보관하는 창고였을 뿐이다. 조선시대 얼음의 주된 사용 목적은 제사를 지낼 때에 신선한 음식을 올리기 위함과,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음을 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여름의 뜨거운 양기(陽氣)를 얼음을 통해 절제한다는 철학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빙고를 관리했다. 석빙고는 1898년에 폐지될 때까지, 오랜 시간 조선에 얼음을 공급하는 창고로 사용되었다.


경주 석빙고의 환기구.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얼음창고와 냉장고


과거 얼음을 사용한 사람들은 왕실과 특권층, 물건을 보존하기 위한 일부 상인들과 환자나 죄수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였다. 얼음을 채취하고, 보관하는 것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얼음을 무한정 보관해 사용할 수는 없었다. 또한 더운 여름에 얼음을 자유롭게 사용하기에는 얼음 가격이 너무 비싸기도 했다. 따라서 석빙고는 세상을 바꿀 과학적 발명품이 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냉장고가 발명되어 널리 사용되기 전까지, 얼음을 실생활에 가장 폭넓게 사용한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지(三國志)];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브라이언 M. 페이건 외 지음, 강미경 옮김, [고대세계의 위대한 발명 70], 랜덤하우스, 2007; 한국고고환경연구소, [나성리유적], 2010; 김길식, [고대의 빙고와 상장례], 『한국고고학보』 47집, 2002; 이우식 기자, [안동석빙고의 장빙례 유래], 포항신문, 2009년 1월 15일자 기사.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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