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 오래전부터 얼음 창고를 사용했다. [시경(詩經)]의 <빈풍(豳風)> ‘칠월(七月)’ 편에는 다음 같은 구절이 있다. “십이월이 되면 얼음을 탕탕 깨어 정월에는 빙고(凌陰)에 넣는다네.” [시경]의 내용은 B.C 10세기경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이미 얼음 창고가 있어서 얼음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B.C 7∼5세기 무렵의 진(秦)나라의 얼음 창고 유적이 협서성 옹성(擁城)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B.C 3세기에 진시황(秦始皇)은 지하 17m에 거대한 토기 단지를 파묻어 빙고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송사(宋史)] <예지(禮志)>에는 신하들에게 여름에 얼음을 내려준 기록이 있고, [명사(明史)] <예지(禮志)>에는 겨울철에 얼음을 캐어 빙고에 넣었다가, 여름과 가을철 제사에 사용한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얼음은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 때나 사용할 수 있었다. 실생활에서 얼음을 가장 널리 사용한 것은 우리 조상들이었다. 뚜렷한 사계절, 얼음을 필요로 하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매우 뚜렷해, 겨울철에는 얼음이 얼고, 여름에는 몹시 덥다. 따라서 겨울에 얼음을 채취해, 잘 보관해 여름에 사용하려는 노력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삼국지(三國志)] <부여> 편의 기록에 따르면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 지낸다(其死, 夏月皆用氷)’고 했다.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얼음을 사용하는 일이 부여의 전체 백성이 아닌 왕과 귀족들에 한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위해서는 얼음이 대량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대량으로 여름까지 보관ㆍ관리하는 시설이 부여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서기 1세기 신라 3대 노례왕(유리왕, 24~57년)때 이미 얼음창고(氷庫)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에는 서기 505년 지증왕 6년 겨울에 해당 관서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토록 했다고 하고, 얼음 창고를 관리하는 빙고전(氷庫典)이란 관청을 두고 대사 1명, 사 1명의 관원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삼국유사]의 기록이 다소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신라에서 얼음 창고를 만들어 얼음을 이용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2010년 충남 연기군 남면 나성리 유적에서 서기 3〜4세기에 사용된 얼음창고를 발견했다는 발굴보고가 있었다. 나성리 유적에서 발견된 수혈유구(구덩이) 가운데 kk-014 수혈은 400×356㎝ 규모의 저장구덩이로 평면 원형의 형태로 바닥면 동쪽으로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배수로 내부에는 직경 10㎝ 내외의 작은 할석과 자갈돌이 채워져 있다. 발굴을 담당한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측은 이것이 창고형 구덩이 치고는 지하가 너무 넓고, 구덩이 밑으로 자갈이 깔린 배수로가 있는 데다, 인근에 금강이 위치한 점을 근거로 얼음창고라고 추정하였다. 이것이 백제시대 얼음창고로 최종 확인될 경우, 조선시대 빙고보다 천년 이상 앞선,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얼음창고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충남 공주 정지산 유적에서 조사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배수로가 딸린 수혈유구를 빙고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시대의 얼음창고의 모습은 [일본서기] 인덕천황 62년조(374년)에 나오는 빙실(氷室) 기록을 통해 상상해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빙실은 땅을 1장(1丈: 약 3m) 정도 파고, 구덩이 바닥에 이엉이나 억새를 깔고 그 위에 얼음을 두고 얼음 위에도 풀을 덮어놓는다.’고 되어있다. 고려시대에는 얼음을 나눠주는 반빙(頒氷) 제도가 정해져, 해마다 6월부터 8월초(입추)까지 벼슬에서 물러난 공신들에게는 3일에 한 번씩, 복야, 상서, 경, 감, 대장군 이상에는 7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누어주도록 제도화했다. 고려는 얼음을 채취할 때 사한제(司寒祭)라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얼음 창고는 왕실과 정부에서만 만든 것은 아니었다. 1244년 당시 최고 권력자 최이(崔怡)는 사사로이 얼음 캐어 서산(西山)의 빙고(氷庫)에 저장하려고 백성을 풀어서 얼음을 실어 나르도록 했다. 얼음에 대한 수요가 커지자, 고려 정부는 1298년 6월 누구나 얼음을 저장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