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나의 생각

(펌) 왜 사람들은 이해하고 바꾸려 하지 않는걸까요?

지오마린 GeoMarine 2019. 10. 9. 19:22

왜 사람들은 이해하고 바꾸려 하지 않는 걸까요? /  by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타인의 의견과 비판에 대한 일반적 사고입니다.

정의를 말할 수 있는 계층

사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오래전부터 알았습니다. 스물 무렵까지의 노력과 성취로 나머지 인생의 보상을 결정하는 시스템입니다. 이미 기성세대가 된 저조차도 알지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며, 방황도 하고, 때로는 가정 상황에 따라 꿈을 포기하는 일도 있다는 사실 말이지요.

흥미로운 일입니다마는 과거 안철수 현상이 있을 무렵 유행한 말이 ‘과보호’였습니다. 그의 정치적 행보와 달리 그 표현은 정확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사회는 대학이라는 학력과 어떤 명문대의 학부라는 학벌을 과보호해왔습니다. 그 평가가 평생을 따라다니며 사람을 측정하는 도구가 되고, 심지어 특정한 면허나 자격까지도 과보호되어 왔던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 중장년이 된 후 직종 간 이동은 매우 어렵습니다. 일종의 브릿지 코스가 없으므로 경쟁은 바로 수직적으로만 벌어집니다. 그러니 기수니 학번이니 따지는 모자란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다양한 배경이 언제든 경쟁할 수 있다면 그런 지표들이 유용할까요?

많은 먹고사니즘에서는 ‘나는 공채출신이야. 그런데 뒷구멍으로 들어와서 나와 같은 대우라니 그건 불합리해’라는 사고가 일반적입니다. 노력이 억울할 순 있겠지요. 그러나 그건 시험 만능주의 시선일 뿐 하는 일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반대로 시험 하나 통과했다고 무능해도 해고되지 않고 좋은 대우가 유지된다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조국 교수의 자녀 이야기로 나온 것은 바로 그 모습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물 언저리까지의 이야기로 평생이 좌우되어 왔기에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여유를 주지 못한 것이지요(사교육). 그리고 편법이나 남들이 알지 못하는 방법을 동원해서 우위를 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여유를 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그렇게 형성된 시장을 더 중시합니다. 그리고 교육을 안타까워하는 척 현장의 교사들을 비웃습니다. 사실 교사들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환경입니다. 내가 가르친 고3 학생의 모습을 보면 앞으로 이 아이가 받을 보상이 어떤 것인지 어떤 편견 속에 살아야 할지 말이지요.

그 종착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받은 딱지였습니다. 아주 극단적 사례지요. 그 어렵다는 고시 패스를 하고 헌법 기관인 판사 임용까지 되었고, 인권 변호사로 도덕적인 삶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비열하게 고졸 딱지를 붙였지요. 그에게 스물 남짓, 20대까지의 문제가 그의 나태함이었을까요? 상고를 다니고, 어려운 사정 다 알면서도 그를 배척하는 유일한 논리가 ‘고졸’이었습니다. 더 노골적인 그들의 요구를 말해볼까요?

고졸 출신이 주제도 모르고 뭐 저렇게 욕심이 많아?

그 시대 ‘사회 정의를 발언할 자격’은 ‘대학생’이었습니다. 오늘날은 누굴까요? 8할이 넘는 대학진학률에서 침묵하는 사람들은 그때의 고졸과 같은 입장입니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면 ‘지잡대 출신이… 꼬우면 수능 다시 쳐’ 입니다. 그러니 말을 못 하는 것이지요. 이걸 잘 해석해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정의를 말할 수 있는 계층을 별도로 부여해왔습니다. 오죽하면 전태일 열사가 ‘나도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이라고 했을까요?

정의를 말하고 합리성마저 불평등한 사회였다는 뜻입니다. 그 인식은 대학 진학 전까지의 삶이 향후 보상의 전부를 대체로 결정하는 시스템, 그 이후의 보상을 재규정하는데 인색한 체제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대학에 다시 가서 롤백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상 체계의 이동을 위해 만든 법전원, 의전원 등이 다 변질한 것입니다. 평생 교육도 취미니 한풀이에 머무르는 거죠.


왜 들어가서 배울 기회는 엄정하면서 허술하게 학위를 따고 부실한 실력에는 한없이 관대할까요? 과보호입니다. 그러니 스물 남짓 이전의 승부에서 모두 다 목숨을 걸고, 부모의 재력과 노력에 일정 부분 종속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해보니 진정한 적폐는 이거 아닙니까? 모두 마음속으로 배제의 원리로 출신을 따지는 것입니다.

‘넌 공채 출신이 아니니까.’ ‘넌 학부가 구려.’ ‘넌 고졸이네. 놀았나 봐.’ ‘난 이렇게 노력했는데, 일 잘하는 건 인정하는데 뭔가 억울해.’

다들 지금을 봐야 하는데, 남의 과거만 봅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격을 찾습니다. 정치인을 뽑을 때도 그럴싸한 자수성가형을 찾고, 명사를 찾습니다. 그가 어떤 비전과 의지를 가졌는지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인재를 찾으니 매번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인사권자의 눈에 ‘명문대’ 말고는 일단 서류 광탈인가봅니다. 그래놓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대안을 제시할 자격도 정하고, 학력이나 출신을 신분 삼아 커트라인을 정했는데 어떻게 사람이 보이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제일 코미디 같은 장면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사회적 문제가 생겼을 때 마이크를 잡는 자들이 하나 같이 ‘전문직’ 사짜들입니다. 어부의 문제는 어부가, 농부의 문제는 농부가, 노동자의 문제는 노동자가 해야 하지만 대부분 그 사건을 이끌고, 마이크를 잡는 것은 엘리트 전문직 출신입니다. 그렇게 안 하면 안 들어주니까요.

뭘 위한 민주화였나요?

이게 우리의 민낯입니다. 왜 90년대 태생, 00년 태생의 서울대 연고대 애들이 ‘발언’이라는 것을 할까요? 과거부터 발언할 자격을 강요한 게 학습되어서 그렇습니다. 같은 물리학도인데, 학계 문제를 이야기할 때 소위 지방대 출신은 그 이야기 자체보다 ‘억울하면 서울대 가지 그랬냐’부터 이야기하니까요.

억울한 민원은 ‘결핍된 자’가 이야기하는데, 왜 가질 수 있는 곳에서 이야기하라고 하나요? 이게 우리 사회의 표현에 대한 보수적 기제 아닌가요? 그런 세상을 안 바꿨으니 후배라고 하는 짓도 그런 거예요. 상식적으로 제일 열 받는 건 최소한 그 경쟁 판에 들어가 보지도 못 하고 탈락한 계층인데, 그나마 떠들 수 있는 깜냥을 따지니 인서울 명문대만 나오는 것이지요.

출처: JTBC

그 애들 탓하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가 방치한 점과 그 기제가 그대로 드러난 현상입니다. 그 깜냥과 주제를 따지는 기성의 문제가 탄생시킨 현상일 뿐입니다. 알면, 이해한다면 조금이라도 생애에서 속칭 패배자들에게 보상을 더 차지할 기회를 주는 것으로 생각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뭘 위한 민주화였나요?

진짜 이해 안 되지요? 지방 청년들은 아무 이야기 안 하는데 지지율을 뚝뚝 떨어지는 거 말입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대학 못 가면 니 탓이라고 등록금이니 뭐니 억울한 거 말하지 말라고 강요했잖아요. 그러니 침묵하고 반대하겠다는 겁니다. 솔직히 지금 구도가 인서울 명문대 안에서 세대 문제로 표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표현의 자유’ 판에 포함될 수 있는 자격이 먼저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서울대는 ‘서울대 거지 같아요’를 이야기하지만 성적 안 좋아서 못 간 애들은 그 이야기 못 해요.

지금에서야 많이 생각이 듭니다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인 건 검사들만이 아닙니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때 그 심리에는 이미 학벌·문벌 심리가 있었어요. 동 세대를 바꾸려고 노력했겠지요. 근데 미래 세대는 가르쳐야 할 대상이고, 본인들 인식도 안 바뀌고, 그렇다고 마이크나 정치 권력도 줄 생각 없고, 인재 없다, 아직 실력 안 된다고… 뭘 위한 권력이고 민주화였답니까? 지금까지 뭐 했는데, 권력이란 것을 잡아 본 적도 없는 세대를 욕하나요?

책임감을 가지고 역사와 우리 마음속의 보수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인식으로 무슨 개혁을 하고 진보를 한답니까? 노동자 간 차별 문제, 대학 문제, 사교육 문제, 종국적으로 계급 문제… 다 이것의 연장선입니다. 결핍된 자들의 주장과 패자의 부활 기회에 인색한 것, 보상의 과보호와 독점 말이지요. 그리고 자꾸 착각하는데 지금 권력자는 바로 그 한때의 민주화 세력입니다. 기득권이 딴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