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2일(일)
18시 30분 비행기로 인천에서 캄보디아 프롬펜으로 가지위해 인천공항으로 전철로 이동 했다.
출발시간이 35분 늦어진다고 한다.
15시경에 같이갈 기준호 회장과 김호동 이규석 사장을 만나서 같이 발권을 하고 입국장으로 들어셨다.
일찍 만난 탓에 저녁식사를 하기위해 식당으로 가니 카운터는 1개만 열려있고, 키로스크 발권도 3개중 1개가 고장이 나 있어서 그런지 식권을 사는데만 긴줄에 대기를 해야 했다.
식권을 발급을 받은 후에도 식사를 하기위해서는 30여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식당은 여러국적의 사람들로 붐볐고 주문에서 식사를 하는과정은 여느 시장통보다 혼잡스럽고 북세통을 이뤘다.
1등 공항이라 말들은 많지만 한가한 면세점, 시장통 같은 식당을 견디노라면 짜증이 확 밀려온다.
이미 상품은 면세점에서 구할 수있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고 무었인가를 먹어야 하는 식당은 다양한 사람들로 붐비는데 공항 운영시스템은 돈을 벌기위한 고민흔적이 없는 구색맞추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한마디로 공항은 공항을 위한 공항에 의한 공항 편의주의만 사로 잡혀 이용객들의 편리함은 사라진듯하다.
2024년 12월 23일(월)
간밤에 늦게 도착해서 Garden City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7시 30분경에 몇 달전 성남에서 사업을 하고 계시는 분의 소개로 연락을 서로 취했던 '정바울 선교사'과 한분이서 로비로 찾아 왔다.
사업관련이런 저런 이야길 나눴다.
1시간가량 니야길 나눈뒤 사업관련 자료는 추후 보내준다고 하시고는 돌아 갔다.
9시에 차량이 우릴 (주)기홍 김호동 사장이 운영하는 소 목장으로 데려다 준다.
호텔에서 약 40여분이 걸려서 목장에 도착했다.
이곳을 관리하는 서 전무의 안내로 소 목장을 둘러봤다.
850두의 소가 자라고 있었고 소 사료배합설비를 갖춰줘 있었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인근에 KOICA에서 지원을 받아 도축장을 운영중이라고 한다.
캄보디아에서는 아직 도축장 시장시설이 없어서 하루에 12마리를 도축할 수있는 시설을 KOICA에서 지원을 하여 위탁운영중이라고 한다.
또, 이 농장은 KOICA와 공동으로 “캄보디아 동물 사료, 가축, 도축 사업의 지속가능한 가격사슬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GH FARM CAMU" 농장에서 직접 풀 사료를 생산하여 고품질의 영양소가 풍부한 풀을 수집하여 우리의 소 농장을 윤용하고 있었다.
회사명 : "GH 농장 CAMU CO , LTD."
KOICA, 캄보디아 사료-축산-유통 통합 사업으로 농가-기업 상생의 지속가능한 가치사슬 구축
위치: Kampong Speu 지방
프놈펜 주소: 60C, 스트리트 336, Boeng Salang commune, Toul Kork district, Phnom Penh.
송아지 한마리를 도축하여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바베큐를 하고있었다.
초벌 바베큐가 된것을 다시 부위별로 구워 점심 식단에 올려준다.
난 우리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한마리의 소가 생명을 더 연장했었을 것 같고 우리들 방문때문에 도축당한 소 때문에 마음이 아렸다.
물론 한점의 소고기도 먹지 못했다.
아니 몬디 이런 마음 때문에 고기와 어류 등을 부득이한 경우가 이니면 먹지 않는다.
이곳에서 소고기로 점심을 하고는 시내로 나왔다.
그 동안 이야기와 자료로만 들어왔던 "Killing Field"의 중심지 [뚜얼 슬랭 추모 박물관]에 3시 경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10/인을 주니 입장권과 오디오를 건네 준다.
1969년~1979년 캄보디아에서 '농경 유토피아 건설'을 내세운 크메르루주의 학살과 기아, 미군의 폭격으로 최대 170만 명이 사망한 사건. 킬링 필드는 '죽음의 들판'을 뜻한다.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한 후 캄보디아를 장악한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는 집권 후 바로 나라를 '개조'하는 데에 몰두했고, 지식인과 성직자를 포함한 대규모 숙청을 시행했다.
이로 인한 희생자는 최소 15만 명에서 최대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 명까지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곳은 크메르 루즈가 12,000 ∽ 20,000명이 수감되었으며 단 2명의 생존자만이 확인 되었다고 하고 이 분들은 자기의 경험을 책으로 저술하여 직접 판매를 하고있었다.
뚜얼슬랭 학살 박물관은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만 불과 4년동안 약 2만명이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같은 시기 캄보디아 전역에서 학살과 기아, 질병 등으로 죽은 캄보디아 국민은 200만 ~ 300만명에 달한다.
이는 캄보디아 국민의 25%에 해당되는 말도 안되는 수치다.
이 시기 캄보디아 전역은 킬링필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뚜얼슬랭' 학살 박물관은 본래 고등학교였다.
'뚜얼슬랭'은 그 옆에 있던 초등학교의 이름이다.
캄보디아의 이전 국명은 민주 캄푸치아다.
캄푸치아 공산당에 소속의 무장 군인단체 '크메르루즈'와 그들의 리더인 '폴 포트'가 캄보디아를 비극으로 이끈 주인공이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의 상류층의 자녀로 태어나, 과거 본인들을 식민 지배했던 프랑스로 유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 기반의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이에 크게 동감하여 캄보디아로 귀국하게된다.
당시 베트남은 통일 전쟁 중이었는데, 사회주의 진영인 베트콩의 보급 운송로인 호치민 루트는 캄보디아의 국토를 지나고 있었다.
민주주의 진영의 남베트남을 지지하던 미군은 호치민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
이 때 캄보디아 국토에 터진 폭탄은 세계 2차대전 때 사용된 폭탄보다 많은 양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캄보디아에는 반미 감정이 일었다.
'폴 포트'는 이러한 국민 정서를 이용해 친미 정권인 론 놀 정권과 대립하였고, 결국에는 캄보디아를 장악할 수 있었다.
'폴 포트'는 자본주의가 절대악이라고 생각하고있었고, 그는 마오쩌둥의 열렬한 추종자하고 있었다.
중국의 대약진 운동을 모방하고 그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캄보디아를 본인 만의 이상적인 공산주의로 만들 계획을 수립했다.
자본가들을 모두 숙청하고 캄보디아 국민 모두를 농민으로 만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방식보다 훨씬 더 미친 이상주의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정권을 장악하고 우선으로 진행한 일은 도시민들을 모두 시골로 내쫓는 일이었다.
그는 수도 프놈펜에 미군의 폭격이 예고되어 있다고 시민들에게 거짓 뉴스를 퍼트려 공포심에 도시를 버리고 시골로 강제 이주를 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주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폭행하고, 심하게 저항하는 이는 처형까지 집행했다.
그는 시골에 집단 인민 농장을 만들어 이주 시민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켰다.
그는 '안경을 쓴 사람은 공부를 많이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부는 어떠한 형태로든 돈을 버는 방법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즉, 자본가다', '손이 고운 사람은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상위 계층의 사람이다, 즉, 자본가다' 이런 식의 미개한 추론으로 자본가를 색출해 나갔다.
차라리 이는 합리적인 색출 기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펜을 가지고 있다, 시계를 볼줄 안다, 책을 똑바로 들줄 안다, 배가 나왔다 등의 이유로 처형 당하거나 수용소에 강제 수용된 이들도 있었다.
정작 폴 포트 본인은 그 어려운 시절에 프랑스로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최상위 기득권의 자본가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은 몹시 아이러니하다.
둘러 보는 동안 12월 3일 윤석열 일당이 자행되었던 계엄과 연상되면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메스꺼워 왔다.
추모관 모든 곳에서 죽음의 공포가 아직은 사라지지않고 축은영령들이 자리 잡고 서글품과 억울함을 토로하는것 같다.
이곳을 벗어나 메콩강에 접하는 어느 근사한 전통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의 삶 > 여행·Tra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1224-캄보디아(2) (9) | 2024.12.30 |
---|---|
제주의 가을-20241010 (17) | 2024.10.14 |
20240429-베트남 하이풍 (0) | 2024.05.05 |
20240318-자카르타(2) (0) | 2024.03.20 |
20240316-인도네시아 자카르타(1) (6) | 2024.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