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없는 한국 개신교와 극우>
김누리 교수 "윤석열의 비극은 전두환의 자연死에서 비롯됐다."
일제 부역자들, 매국노를 처벌하지 않은 후과는 오늘날 윤석열이라는 괴물을 낳는 배경이 되었다.
한국의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일제에 부역한 죄과를 묻지 않은 결과 오늘의 범죄에 용기를 주었으며 오늘의 관용은 다시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불어넣어줄 뿐이다.
오늘날의 개신교 중 특히 대형교회가 왜 극우를 지원하고, 교회 자체가 왜 극우적 성향을 띄는지 의아할 때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배경과 정착해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소나마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오늘날 어떻게 그 죄과가 반복되고 있는지 전우용 교수의 강의가 있어 아래에 정리해봄니다.
미국은 개신교가 만든 국가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후 유럽에 비해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워지면서 미국적 가치의 핵심인 민주주의, 청교도정신을 전 세계에 퍼뜨려야겠다는 확신에 찼다.
그 때문에 미국의 개신교가 조선에 들어올 때는 종교적 가치보다는 미국적 가치를 들고 전교를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조미수교 후 교육자와 의사를 양대 축으로 선교사를 파견해 학교, 고아원, 병원 등을 세우고 복음으로의 접근이 아니라 교육과 의료를 선교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고종은 열강과의 사이에서 도움을 청할 마땅한 루트가 없자 선교사들을 대우해주었고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제중원 의사 알렌에게 민영익이 사례금 100만 냥을 주었고, 언더우드에게는 왕비가 결혼 축하금으로 100만 냥을 주었다.
당시 서울의 집 한 채가 3000냥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각각 집 333채를 살 수 있는 막대한 금전을 하사한 것이다.
선교사들이 지방 관리에게 횡포를 부리기도 했는데 이를 조선이 처벌하지 못하자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 눈에는 이것이 권력으로 비춰져 권력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또한 선교사 눈에 띄면 공부를 하고 유학도 갈 수 있었기에 종교를 세속적인 출세의 기회로 여기게 되었다.
조선 사람들에게 선교사는 부와 권력을 모두 거머쥔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지방에 별장을 두고 조선 최고의 부자로 살던 모습이 당시 선교사의 이미지였다.
그들은 절대 가난한 목회자가 아니었으며 문명화, 물질 숭배에 있어 세계 최고였던 그 이미지가 그대로 굳어져 한국 개신교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미국이 부강해지면서 미국의 개신교도들은 그것이 자본주의와 기독교 덕이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그 결과 미국의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묘하게 연결된 상태가 미국식 개신교이다. 그리하여 종교가 부유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개신교 지도층의 생각이며 논리이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잘 살게 되며 나라도 부강해진다는 한국 개신교의 불문율이 이렇게 탄생을 했다.
선교사가 보여준 삶을 통해 보면 개신교는 영적인 문제보다 세속적인 문제로 접근을 했고 잘못은 회개를 통해 모두 용서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인지도도 낮고 독립운동도 별반 한 게 없는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이씨왕조 부활을 원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독립운동가 중에 드물게 이승만이 이씨라는 점이었다.
또 하나는 이승만이 다닌 미국 내 대표적인 개신교 대학인 프린스턴대학이 당시 미국 대통령인 윌슨이 여기 출신이라는 점이다.
가난한 조선의 개신교인들이 가졌던 희망은 조선이 미국처럼 되는 것이었다.
1920년대까지 개신교는 반일이었고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미국과의 교류가 단절되며 미국 개신교의 지원이 끊겼다.
일제는 조선기독교인들에게 미국과 일본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했다.
조선기독교는 이때부터 급격하게 친일로 돌아섰다.
평양조선노회는 ‘신사참배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례다.’라며 신사참배를 찬성했다. 교회 내에도 신사의 축소판인 작은 신사를 만들어 1부 예배에 신자들의 참배를 독려했다.
‘일본 최고의 신이 제1신이고 하느님은 제2신이다.’
신사참배에 불만인 신자들이 1부 예배를 피하고 2부 예배만 참석하자 목사가 신자를 밀고했다. 일부 교회들이 교회 종 헌납 운동을 벌였으며 교회를 팔아 일제에 헌납하기도 했다.
부산 고신파 목사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따로 고신체계를 만들었으나 이들은 세력이 미약하다. 일제에 부역하고 살아남은 교회들이 대부분 대형교회로 발전해 현재로 이어졌다.
이들은 여타의 친일 부역자들과 같이 반공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물타기 했으며 신분을 세탁했다.
그러니 한국개신교가 일제청산에 대해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한국개신교의 회개 없음이 지탄 속에서도 오늘날 전광훈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지금이라도 회개는 늦지 않았다.
회개가 교회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한국 개신교는 썩어도 너무 썩어 회개할 수도 회개가 교회를 자유롭게 하지도 못할지도 모른다.
철저한 저자거리의 장돌뱅이로 변해 아무나 잡고 삥이나 뜯는 양아치가 된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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