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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와 공존해야 된다는 칼럼에 대한 긴 각주

지오마린 GeoMarine 2025. 3. 2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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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우와 공존해야 된다는 칼럼에 대한 긴 각주
1. 수정의 밤 Kristallnacht.
나치 행동대원들이 유대인 상가의 유리창을 모조리 박살냈고, 그 깨진 유리들이 크리스탈처럼 반짝거려 수정의 밤이라 불리운다. 1938년 11월 9일 밤과 11월 10일 아침 사이. 수백 채의 유대교 회당이 불타오르고 7천 개의 유대인 상점이 박살났으며, 3만 명이 감옥으로 끌려갔고, 91명의 유대인이 살해됐다.
'수정의 밤'은 나치즘의 변곡점이었다. 사건 이후로 세력이 급성장했다. 파시즘 연구의 대가인 로버트 팩스턴은 이렇게 의문을 표한다. "왜 그런 만행에 어떠한 소송도, 법적-행정적 조사도 없었던 것일까?" 만일 이 가공할 폭력 사태에 대해 사회적 추궁이 제대로 일어났다면 나치 세력이 그렇게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할 수 없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린다.
로버트 팩스턴은 수정의 밤이 단죄되지 못했던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한다. '사법 제도의 결핍', '종교적 시민적 권위의 결핍', 그리고 '시민 저항의 결핍'. 이 결핍들이 모여 묵인의 악순환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묵인의 악순환 속에서 과격한 사회적 소수는 모든 금지에서 완전히 풀려나 지금까지 세련된 문명사회로 알려진 나라에서 인종 학살이라는 야만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과격한 소수를 단호하게 사법적으로 제압하지 못할 때, 시민사회가 그들을 충분히 제어하지 못할 때, 폭력의 정동을 압도하는 시민 저항이 없을 때 그 과격한 소수가 모든 금지에서 풀려나 눈덩이처럼 몸집을 키우며 거리와 의회를 폭주하면서 파시즘을 구축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팩스턴은 20세기 초반, 미국과 프랑스와 비교해 민주주의 제도가 덜 성숙되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파시즘에 취약했다고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 파시즘의 특징은 거리에서 활보하는 극우 자경단으로 표상되는 '직접 정치'와 합법적 선거 제도를 통해 권력을 잡는 '의회 정치'의 변증법적 합일이다. 거리의 직접 정치와 의회 정치가 만나 대중 동원 정치로 도약하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 파시즘은 양차세계 대전 사이에서 전쟁 패배에 따른 민족주의적 열패감, 식민지 배분, 자본 축적의 위기, 더 나아가 서구 근대화의 폭력적 여파 등 여러 문제가 중층적으로 쌓여 생긴 파국의 사태였지만, 역사적 변곡점을 이루었던 '수정의 밤'과 그에 대한 사회적 추궁의 부재는 바로 민주적 절차와 기반이 파시즘 정치와 폭력을 봉인하는 중요한 결계라는 걸 충분히 예증한다.
왜 극우 포퓰리즘은 한국과 인도와 같은 아시아, 동구권,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미국처럼 민주주의의 사회화가 약한 지역에서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거나 쿠데타 형태로 더욱 매섭게 경화되는가? 이 지역들은 군사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거나 미국처럼 금권정치와 신자유주의에 의해 꾸준히 민주적인 통제 장치가 침식된 지역들이다. 반면, 서유럽에서도 극우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지만 왜 이곳에서의 극우 세력은 헌정 질서를 위협하기보다 기존의 선거 제도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가?
이와 같은 다양한 층위의 질문들을 들여다보기 위해 우리는 1938년 수정의 밤을 제압하지 못했던 실패의 교훈을 재차 참고할 수밖에 없다.
2. 2016년 이래, 미국인의 상당수는 과연 트럼피즘이 파시즘인가 자못 궁금했다. 그래서 적잖은 언론 지면이 로버트 팩스턴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했다. 당시, 파시즘 연구의 아이콘인 팩스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No'였다. 트럼피즘은 단순한 '금권정치 Plutocracy'라는 것이다. 하지만 2021년 트럼프 지지자들과 극우들이 미국 의사당을 침탈하고 폭동을 일으키자, 팩스턴은 그의 의견을 다급하게 수정한다. 파시즘이 맞다는 거였다.
의사당에 쳐들어가 헌정 질서를 갈가리 찢어버린 극우 세력의 폭동을 '수정의 밤'의 21세기 미국판 버전으로 해석한 셈이다. 마침내 직접 정치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해석의 완결은 오히려 미 대법원이 의사당 습격을 독려한 트럼프에게 면책권을 부여한 순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극우의 맹동을 제압하지 못한 사법 제도의 결핍, 시민사회의 부족한 역능. 그 덕에 트럼프는 재선에 성공하며 화려하게 귀환했고, 기다렸다는 듯 의사당 폭동에 관여했던 극우들의 모든 죄를 사했다.
미 대법원은 지금 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이주민 강제 추방에 대한 법원의 제동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법원의 명령을 무시한 채 추방을 강행하면서 헌정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또 폭스뉴스는 트럼프 행정명령을 제한하는 데 투표한 대법원 판사들의 명단을 공공연히 생중계하면서 폭력을 사주하고 있으며, 트럼프는 자신의 행정명령에 반대한 판사들을 탄핵해야 한다며 한껏 목청을 높이고 있다. 거기에 더해, 일론 머스크는 위스콘신 주 대법원 판사 선거에 개입해 돈으로 선거 자체를 매수하려고 든다.
요컨대, 미국 사회가 의사당 폭동 사태를 충분히 제압하지 못한 채 트럼프와 극우들의 고삐를 놓아주었기 때문에, 그리고 민주주의 헌정에 기반해 미국 대법원과 시민사회가 의사당 폭동을 철저히 단죄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헌정의 지각을 뒤흔드는 트럼프 2.0 시대를 목도하게 된 것이다.
3. 3월 25일, 브라질 대법원이 쿠데타 명목으로 기소된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재판하게 될지 면책할지를 놓고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브라질 검찰청은 의사당과 대통령궁을 침탈하고 룰라를 암살하려고 했던 극우 세력와 그 뒷배였던 보우소나루를 심판대에 올려놨다. 아마도 보우소나루 재판을 결정한다면, 브라질은 의사당 폭동 사태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 미국과 상이한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한국은 탄핵 선고를 기다리는 중이다. 만일 윤석열이 파면되고 내란죄로 확실히 처벌된다면, 그리고 군부를 비롯해 내란 관여자들을 확실히 처벌한다면, 또 서부지법 폭동 가담자를 그에 걸맞게 처벌한다면 적어도 한국 역시 미국의 길과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셈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란 가담자와 극우'를 '극우 이념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구분하는 것이다. 일단 내란 가담자를 처벌하자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극우와 공존해야 된다'는 문제의 칼럼을 쓴 정희진 선생에게도 그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문제는 극우라는 표현이다.
포퓰리즘 연구가인 키스 무데는 극우 세력을 '폭력 충돌 장사꾼'이라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폭력의 직접 정치를 구사하는 존재들이다. 길거리에서 폭력을 사주해 정치적 지분을 얻어내는 세력, 길거리에서 폭력과 충돌을 일으켜 돈과 종교적 지분을 얻는 기독교 파시스트들, 길거리에서 직접 폭력을 야기하며 장사를 하는 극우 유튜버들 같은 이들이다.
애초에 이들은 폭력을 통해 이득을 취하기 때문에 공존이 가능하지 않다. 폭력과의 공존은 그것 자체가 폭력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극우란 누구인가? 윤석열인가? 윤석열과 함께 쿠데타를 도모했던 군부인가? 윤석열과 국힘까지를 포함하는가? 아니면 서부지법 폭동 가담자까지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내란과 서부지법 폭동에도 불구하고 국힘의 힘을 지지하는 30% 이상의 유권자를 의미하는 건가?
'극우 세력'과 '극우를 지지하거나 지지할 수도 있는 보수적인 사람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냥 퉁쳐서 극우라고 부를 때 혼란이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공존이라는 말은 듣기에는 좋으나 혼돈의 이름이 되고, 결국 폭력과의 공존을 추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윤석열 내란 일당과 서부지법 습격범, 전광훈을 비롯해 내란을 선동하고 조직했던 기독교 파시스트들, 극우 유튜버들들에겐 공존이 아니라 처벌이 필요하다. 또 학교마다 돌아다니며 폭력의 자국을 남겨놓는 폭력 충돌 장사꾼들에 대한 민주적 통제도 필요하다.
앞서 충분히 예시했듯, 단호한 처벌만이 민주적 기제의 정당성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 불이 나 모든 걸 집어삼키려고 하는데 그 불과 공존이 어떻게 가능한가? 공존이 아니라 불을 끄는 것이 먼저다. 이들의 반민주적 폭력이 민주주의와 함께 기계적 중립을 통해 나란히 배치되는 순간, 끊이지 않는 반목과 전쟁과도 같은 영구 정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화합과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전두환을 풀어준 댓가를 이미 혹독하게 치르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극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제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또 다른 반민주적 폭력일 것이다. 죽일 듯이 의견이 달라도 서로를 지옥처럼 견뎌내야 하는 게 민주주의의 숙명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거론하면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된다. 정치인들의 입에 발린 말들, 그 공허하고 늙은 말들을 보라. 화합, 공존, 상생, 조화, 협력, 협치...... 블라블라.
현실을 제거한 그 공허한 말잔치는 결코 그다음 단계를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실재의 풍경과 실재의 정치를 감춘다. 이 세계가 마치 개인 원자들의 자유의지만으로 구성된 것처럼, 그래서 각자가 공존의 의지를 갖고, 화합의 의지를 갖고, 상생의 의지를 갖고... 블라블라 계속 우리의 세계를 공회전시킨다.
가장 문제는 공존이라는 말에 담긴 체념의 정조다. 극우 세력의 먹잇감이 되는 사람들의 분노와 외로움을 그냥 방치해야 하는 걸까? 세상이 불타서 없어져도 상관없다는 저 절망과 분노를 그대로 놔둔 채 그저 말뿐인 공존의 쳇바퀴 속에서 열심히 발만 내저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공존이 아니라, 차이의 병치가 아니라 공통성을 찾아가는 것. 공유지를 창조하고 공통적인 것을 찾아내는 것, 요컨대 정치를 다시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우리 삶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공동체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지금의 저 잔인한 자본주의 체제의 조타수를 변경하려는 강인한 이론의 말과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나한테도 필요하고, 너한테도 긴요한 삶의 공통 함수를 찾아내 다리를 놓는 정치 말이다.
사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극우 세력을 단호히 처벌하는 것과 보수든 진보든 서로에게 전가하는 타자화와 폭력성을 줄이기 위해 공통의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동면의 정치다. 그것이 분리되는 순간, 다시 말해 지금처럼 절차적 민주주의에만 정박된 채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도외시하는 위선의 체계를 지속하는 한 극우의 정념은 거듭, 거듭 그 안에서 되살아날 수밖에 없다.
때론 공허한 말보다는 그냥 단순한 구호가 더 나을 때가 있다. 극우 세력을 단호히 처벌하자, 그리고 함께 잘 어우러져 살 수 있도록 사회를 바꾸자.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긴 각주를 단 것은 오늘 헌재가 선고일을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다 헌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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