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문명과 기후
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
- 로마의 영토 확장은 온난한 기후에서 이루어져 이 시기를 로마의 기후 최적기라 부른다. 5세기에 기후가 나빠져 북아프리카가 메마른 땅이 되면서 로마의 곡식 창고가 사라졌고,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됐다. 중세 초기의 기후 악화기는 로마의 멸망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로마 문명의 태동기
로마인들은 기원전 600년경부터 이탈리아 중심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지역은 밀 같은 다수확 작물을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아 이들은 올리브와 포도 등 과수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풍족히 살 수 없었던 로마인들은 밖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로마인들의 외부팽창 요인을 이해해야만 로마 문명도 이해할 수 있다. 로마의 건국 신화에는 이러한 외부팽창과 성장, 폭력과 관련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로마를 건국한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부족은 아내를 맞이하려고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근처에 사는 사비니 사람들을 꾀었다. 그런 다음 여자들을 납치해 결혼한 뒤 아이를 낳고 살게 되었다. 몇 년 뒤 사비니 남자들이 쳐들어왔을 때 로마인들은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로 필요한 것을 얻는다.
로마인들은 외국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통합해 대제국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보병 전술과 신화, 예술, 건축은 그리스에서, 중기병과 말에 관한 전문 지식은 페르시아에서, 전함 기술은 강력한 해상 세력인 카르타고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인들은 수용력과 함께 거칠고 사나운 힘과 끈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특성은 공화정 초기에 멸망의 위기를 몇 차례나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 에페이로스의 장군 피로스가 진격해 왔을 때도 로마는 큰 위기를 맞았다.
피로스는 기원전 280년 이탈리아 남부로 진격해 뛰어난 기병과 코끼리로 로마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다음 해에 벌어진 아스쿨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병사를 많이 잃었다. 전투가 끝난 뒤 피로스는 “이런 승리를 한 번만 더 하면 우리는 끝장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실속 없는 승리를 뜻하는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피로스는 시칠리아로 물러났다가 2년 뒤에 다시 쳐들어왔지만 로마군은 그동안 전력이 더 강해져 있었다. 숫자에서도 밀리고 전력에서도 밀린 피로스는 달아났고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해안지대에 남아 있던 그리스 도시들을 다 점령하게 된다.
로마의 지중해 정복전쟁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가 통일되자 로마는 지중해로 눈을 돌렸다. 이들이 처음으로 눈독을 들인 곳은 시칠리아였다. 이탈리아 반도보다 기후가 좋고 토질도 좋아 농작물을 기르기에 적합한 땅이었다. 그러나 페니키아의 식민지여서 쉽게 점령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페니키아의 수도는 북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카르타고였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이기로 한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첫 번째 전쟁(기원전 264~241년)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로마의 뛰어난 모방력으로 만든 새 함대 덕분이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카르타고 선박의 구조를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적함에 걸쇠를 거는 ‘까마귀’라는 공격용 다리를 덧붙였다. 로마군은 해전을 백병전으로 바꾸어 마치 육지처럼 싸울 수 있었다. 백병전에 강했던 로마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전술이었다. 기원전 241년에 패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로마에 넘기고 막대한 돈을 배상한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니발이라는 카르타고의 걸출한 장군 때문이었다.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에 용병 부대와 아프리카 코끼리를 이끌고 에스파냐로 올라와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그는 북쪽에서 기습 공격을 가해 몇 번이나 승리를 거두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이탈리아 남동부의 아풀리아 근처에서 벌어진 칸나이 전투(기원전 216년)다. 야전에서 패하자 로마는 전략을 바꾼다. 한니발에게 도시의 성벽을 돌파하는 데 필요한 포위 공격용 장비가 없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이후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충돌을 피했다.
그러는 동안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의 본거지로 진격해 들어갔다.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구하기 위해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하고 말았다. 카르타고는 이 패배로 인해 에스파냐를 포함한 모든 식민지를 로마에 넘겼고, 육군과 해군을 갖는 것이 금지되었다. 물론 막대한 배상금도 지불해야 했다. 이 전쟁에서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거둔 로마는 해외팽창정책을 펼친다.
로마는 적의 전술을 자신들에게 맞게 고쳐 기병대와 전함을 하나로 통합한 전술 개념을 만들었다. 정복을 할 때마다 재물과 전쟁 포로 등 엄청나게 많은 전리품을 챙겼고, 전쟁 포로는 노예로 만들었다. 노예들은 그들의 집과 농장, 수많은 건축 현장에서 무료 노동을 제공했다. 거대한 건축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세워졌고, 결국 로마는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되었다.
팍스 로마나
로마는 기원전 146년에 그리스를 제국에 통합했고, 기원전 129년에는 소아시아(터키)를, 기원전 64년에는 폼페이우스의 지휘 아래 아르메니아와 레바논, 시리아, 유대를 정복했다. 기원전 31년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집트 정복은 로마의 식량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나일 강 유역에서 거의 무한정 공급되는 곡식이 로마인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해 준 것이다. 기원전 30년에 로마의 인구가 50만에서 100만 사이가 된 것은 이의 영향이 크다.
카이사르에 의해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와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영국)도 정복되었다. 북서쪽으로는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이 자연스럽게 국경을 이루었다. 로마는 강을 따라 상비군을 주둔시켜 고트족과 서고트족 같은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았다.
로마군은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었지만 늘어나는 전쟁으로 인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해졌다. 결국 부랑자와 가난한 사람도 군인으로 받아들여 로마군은 군정장관의 명령을 받는 상비군으로 조직되었다. 군정장관에게는 로마의 허락 없이 속주를 떠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지만, 기원전 49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관례를 깨고 로마로 진군해 제국을 내전으로 몰아넣었다.
기원전 90년에서 27년까지 벌어진 일련의 내전은 로마의 정치를 바꾸었다. 기원전 509년경 시작되어 평민(플레브스)에게도 발언권을 일부 주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공화정이 점차 폐기된 것이다. 대신 황제가 다스리는 독재 체제가 들어섰다.
기원전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으로 추대된 순간부터 공화정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기원전 1세기 말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흔들리던 로마를 다시 통일시킨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제정 시대를 열었다.
제정 초기의 로마 제국은 강력한 패권을 바탕으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구가했으며, 라틴 문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년~117년)에 제국은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여, 그 패권이 스코틀랜드에서 수단, 포르투갈의 대서양 연안에서 캅카스 지방까지 미쳤다.
이 영역은 오늘날 미국 영토 면적의 2/3에 해당하고, 인구는 1억 5천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의 세계를 이룬 이 거대한 제국 안에서 그리스, 오리엔트, 서유럽 등 고대 세계의 여러 문화가 융합되고 다시 확산되었다. 로마는 서구 세계의 법, 정치, 군사, 예술, 문학, 건축, 기술, 언어 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로마가 팽창하던 시기의 기후
로마도 다른 문명처럼 영속적인 제국은 아니었다. 게르만족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로마 제국은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우선 기후를 보자.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의 경계는 현재 프랑스 마시프상트랄(Massif Central)의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이곳에서는 기후경계대가 몇 미터만 이동해도 온대에서 지중해성 기후대로 변한다.
고고학자 크럼리(Carole Crumley)는 지난 3천 년간 이 추이대의 이동을 추적했다. 그 결과 기온이 낮았던 시대에는 그 경계가 지금보다 훨씬 남쪽으로 북위 36도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해안이었음이 밝혀졌다. 기온이 올라가는 시기에는 경계가 북해와 발트 해 연안까지 북상했다. 거리 차이는 약 889km로, 위도상으로는 무려 12도나 된다. 크럼리는 이러한 기후지대의 남북 이동이 지금까지 유럽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한다.
로마 문명이 발전했던 시기를 서브애틀랜틱(Subatlantic)기라고 부른다. 시원한 여름과 온화하고 비가 많은 겨울이 있는 기후였다. 이 기후는 로마의 왕정과 공화정을 아우르는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런 기후로 인해 북아프리카가 로마 제국의 곡식 창고가 된 것이다.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기에는 기후가 따뜻한 편이었다. 알프스 북부는 지금보다 더 따뜻했고, 근동과 북아프리카에서는 습한 기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서기 120년경 이집트의 천문학자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는 기후일기를 썼다. 그가 쓴 일기는 8월을 제외한 모든 달에 내린 비에 관한 정보와 함께, 당시의 기후가 오늘날의 기후와 확연하게 달랐음을 보여준다. 좋았던 기후는 4세기에 들어와 춥고 건조해졌다. 북아프리카는 메마른 땅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로마는 남쪽으로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기후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공격 방향을 북쪽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기후를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로마 제국의 영토 확장은 온난기라는 기후조건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기후사에서는 이 시기를 로마의 기후 최적기라 부른다.
기원후 1세기에서 400년경까지 온난화는 기온의 상승과 빙하의 해빙을 가져왔다. 이런 기후가 북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알프스 횡단이 일 년 내내 가능해지면서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라이티아1), 노리쿰2)의 정복과 통치가 용이해졌다. 플리니우스가 남긴 문헌에는 포도와 올리브가 이전보다 훨씬 북쪽에서 재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포도 재배의 북한계는 기후를 가늠하는 좋은 지시자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96)가 알프스 북부에서 포도 재배를 금하는 칙령을 내린 일도 있었다. 이는 당시의 기후조건이 알프스보다 훨씬 북쪽에서도 포도 재배가 가능할 만큼 따뜻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로마는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 시대에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영토는 스코틀랜드의 국경에서 카스피 해와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로마 제국은 갈리에누스 황제(재위 253~268) 시대에 굶주림과 흑사병의 창궐로 인구의 감소가 있었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재위 270~275) 때 다시 제국의 지위를 회복해 테오도시우스 황제(재위 379~395)가 분열되어 있던 제국을 다시금 통일했다. 기후사가들에 따르면 당시의 기후 조건은 좋은 편으로 로마의 기후 최적기가 다시 나타났던 시기다. 395년에 로마는 동로마(비잔티움)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할되었다.
로마가 멸망하던 시기의 기후
로마 제국의 심각한 문제는 5세기에 접어들어 기후가 불리해지면서 시작되었다. 소빙하기로 날씨가 추워지면서 북아프리카가 완전히 메마른 땅으로 변모했다. 로마의 곡식 창고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진짜 큰 위기는 기후변화로 인해 게르만족이 대이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동쪽의 유목민족인 훈족에게 쫓긴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계속 밀려오기 시작했다.
에우기피우스(Eugippius)는 자신이 저술한 성 세베리누스(410~482)의 전기에서 로마 제국의 붕괴를 상세하게 서술했다. 전쟁과 폭력이 지배한 세계에서 날씨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세베리누스의 전기에서는 추위와 굶주림, 질병에 대한 언급이 끊임없이 나온다. 세베리누스가 병들고 굶주린 이들을 돕기 위해 구호품을 실은 배를 띄웠지만, 그 배는 라인 강의 얼음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다뉴브 강도 혹한으로 얼어붙어 마차들까지 강을 그냥 횡단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빙하기가 닥치면서 북유럽에서는 추위가 문제였던 반면에 근동, 북아프리카,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가뭄이 가장 큰 문제였다. 건기에 카스피 해의 수면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남이탈리아, 그리스, 아나톨리아, 팔레스티나에서는 주거지들이 해안으로 옮겨지고, 배후지는 공동화되었다. 소아시아의 에페소스, 팔미라, 안티오키아 등의 대도시들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아라비아에서는 발달된 관개시스템 덕분에 농업이 활발했던 600여 개의 주거지역이 버려졌다.
독일의 기후학자 쇤비제(Christian D. Schönwiese)는 서기 1000년경부터 잉글랜드 중부의 기온이 1~2℃ 정도 높아졌다는 사실에 근거해, 중세 초기의 기후 악화기를 서기 450년부터 750년까지로 추정한다. 즉 로마의 멸망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은 무척 다양하다. '문명의 충돌'의 저자 헌팅턴은 여러 원인 중 기후변화로 촉발된 민족 대이동이 결국 로마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각주
- 1지금의 티롤, 바이에른 및 스위스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
- 2도나우 강 남부와 오스트리아 중앙부 및 바이에른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
발행일
- 2017. 0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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