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나의 생각

내전으로 가는 문턱에 서서

지오마린 GeoMarine 2025. 3. 10. 08:47

내전으로 가는 문턱에 서서

20세기 후반 대부분이 내전상태였던 영국령 북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 아일랜드계와 개신교 영국계가 강하게 부딪혔다. 툭하면 암살과 폭탄테러가 일어날 정도로 폭력의 강도가 높아 이 시기를 정관사에 대문자까지 써서 ‘그 분쟁(The Troubles)’이라고 부른다. 갈등의 연원은 무려 제임스 1세(1566~1625)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에 저항하던 아일랜드계 귀족이 스페인으로 도주하자 북아일랜드는 권력 공백 상태가 됐고, 영국 정부는 그 자리에 개신교 영국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땅을 빼앗긴 아일랜드 원주민은 외곽으로 밀려나면서 피지배 민족으로 전락했고, 그 상태가 350여 년 이어졌다.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시작된 ‘민권운동’ 바람이 대서양을 건너 북아일랜드에 도달한다. 각성한 아일랜드계가 1967년 ‘북아일랜드민권협회’를 조직하고 대중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북아일랜드는 친영계 정당이 50년 넘게 독재를 하고 있었다. 기괴한 게리맨더링으로 아일랜드계의 정치참여는 심각하게 제한됐다.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는 한 공직 진출은 꿈도 못 꿨고, 항공사와 조선소 같은 좋은 일자리에도 취업할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이 스스로 차별의 장막을 걷어내려 일어선 것이다.

영국계는 아일랜드계를 초장에 밟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1969년 8월 12일 데리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계의 승전기념일 행진에서 일군의 행렬이 일부러 아일랜드계 주거지로 방향을 틀었다. 고의적인 도발이었다. 질서 유지를 핑계로 투입된 왕립경찰은 노골적으로 영국계를 보호하고 아일랜드계는 폭력으로 진압했다. 저항이 격화되고 화염병까지 등장하자 경찰은 군투입을 요청했다. 이 소식이 당일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와 다른 도시에도 전해졌다. 흥분한 영국계가 아일랜드계 주거지를 습격해 가옥 150여 채, 점포 270여 개를 파괴했고, 난민도 1,500명 넘게 발생했다. 경찰과 군인이 투입됐지만 중립적인 평화 유지가 아니라 폭도로 규정한 아일랜드계를 진압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때 8명이 총격으로 사망하고 75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역사가들은 이 폭력사태를 기점으로 ‘그 분쟁’이 시작됐다고 평가한다. 갈등은 수백년이 되는데 왜 이날을 콕 집었을까? 군대를 포함한 ‘공권력’이 본격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급진무장단체(PIRA)를 조직해 무력으로 저항했다. 1998년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체 인구 150여 만명의 북아일랜드에서 3,532명이 사망하고 4만 7,5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인구 5,000만 명으로 환산하면 사망자만 11만 7,600여 명에 이른다.

지난 토요일 검찰은 내란 우두머리 혐의자 윤석열을 석방했다. 유죄가 인정될 경우 최소 무기징역(무기금고) 최고 사형을 받게 될 중범죄 혐의자가 버젓이 시내를 활보할 수 있게 됐다. 그의 직무는 중지된 상태지만 행정권력은 여전히 그의 손아귀 안에 있어 보인다. 당장 검찰이 그의 졸개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고, 이달 초에는 경찰 승진자도 비상계엄 연루자들로 가득 채웠다. 만에 하나 탄핵마저 기각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군대를 동원하기 어려워진 대신 서부지법을 습격했던 세력을 부추겨 시민사회를 공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들 뒷배를 봐주기 위해 검경 공권력은 너무 쉽게 남용될 것이다. 2020년대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 북아일랜드 상황을 떠올리는 현실이 비참하다. 아무쪼록 헌법재판소가 이번 주에 윤석열을 파면해주기 바란다.
[펌] 김태훈, 경남도민밀보, 202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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