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나의 생각

조선산업의 클러스트

지오마린 GeoMarine 2025. 3. 11. 09:22

[조선 클러스터 전쟁]

인구는 많은데 산업 발전은 더딘 여러 개도국들은 조선업 육성에 관심이 많다.
개도국은 아니지만, 오래전 번성했던 조선업이 쇠락한 미국과 영국 등도 다시 조선업을 부흥시키는데 의욕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 이후 개도국들 중에서 조선업을 성공적으로 육성하는데 성공한 나라는 한국, 중국 정도이며 브라질, 인도네시아, 인도 등은 실패했다 (일본은 전쟁 전 이미 항공모함을 만드는 나라였으니 제외).
어떤 차이로 인해 한국과 중국은 조선업이 크게 발전했고, 다른 나라들은 어려움을 겪었을까?

조선업과 일반 제조업의 큰 차이점은 무거운 중량물을 다루면서도 소재, 기계, 전기, 화공 등의 후방산업들이 집약되는 종합제조업이라는 특성이다.
또한 자동화된 설비 위주로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많은 노동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일을 하되, 도크와 대형 크레인으로 이루어진 대형 공장이라는 투자가 많이 필요하다는 특징도 있다. 한 마디로 조선업은 묘하고 독특한 산업이다.

선박의 가격이 1000억원이라고 할 때, 조선소가 희망하는 원가 구성은 대략 재료비 60%(강재 20%, 엔진/기자재 20%, 기타 20%), 인건비 20%, 경비 10%, 이윤 10% 정도이다. 재료비의 비중이 절반이 넘으므로 조선소 인근에서 공급망이 얼마나 잘 구축되었는지, 즉 조선 클러스터가 형성되었는지 여부가 그 조선소의 경쟁력을 결정한다.

현대중공업이 처음 울산에 도크를 파면서 VLCC 2척을 지을 당시 철판, 엔진, 각종 기자재 등 거의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수입했었다. 중량물들이므로 운송 비용 그 자체도 꽤 들었고 서비스 엔지니어들의 파견 비용도 비쌌다.
배를 처음 짓는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실수도 많았지만 자재를 대부분 수입하는 상태에서 돈을 남기기란 매우 어려웠다.
포스코에서 선박용 고품질 후판이 생산되면서 이런 상황은 개선되었다. 창원에 기계공업 단지가 만들어져서 선박 엔진이 생산되고, 울산과 부산에 각종 기자재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2000년대 이후로는 거의 대부분의 자재를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었다.

이제는 한국 조선업은 클러스터를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구조가 되었다.
근대적 조선소가 영국과 미국, 일본에서 150년 전에 만들어졌을 때는 조선소 내부에서 철판 절단, 엔진 제작, 파이프 가공 등을 다 했었다. 이를 분업화하여 선박의 대량 생산을 실현한 것이 1940년대 미국이었으며, 일본은 상선 건조 분야에서 scale-up 하여 전세계 조선업을 1960년대 석권했다.
한국 역시 처음 대형 조선소를 세울 때는 조선소 안에서 엔진 등 복잡한 기자재를 제외한 왠만한 의장품은 다 자체적으로 만드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후 배관과 철의장재를 시작으로 조선소 밖의 별도 업체를 통해 만들게 하고, 유닛 구조로 공급 받아서 조선소에서는 전체 조립를 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클러스터의 주변부에서 부품을 모아 반완제품을 만든 후 조선소에서 마무리하는 방식의 결정판은 2000년대 후반 등장했다.
배 전체를 3~5 토막을 내어 각각 외부 공장에서 각각의 토막 (기가/테라 블록)을 만들어 가져온 후 조선소에서는 이를 합쳐서 마무리하는 공법이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배가 그 조선소에서 만든 것인지, 외부 공장에서 만든 것인지 판단하기도 어렵다. 한국 조선업은 메가/기가 블록을 한국 내에서 생산하는 수준을 넘어 중국에서도 일부를 만들어서 가져오고 있다.

클러스터가 발달한 조선소의 원가와 생산 속도를 클러스터가 없는 조선소는 따라갈 수 없다. 한국의 어떤 조선소가 1000명으로 20척의 배를 짓는다고 할 때, 사실 보이지 않는 외부 공급망의 역할도 크다.
외부 공급망에 2000명이 일한다고 하면, 사실 외국에 새로 조선소를 만든다면 3000명 이상의 인원이 있어야만 20척의 배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동남권 조선 클러스터는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밀집된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개별 조선소만 뚝 떼내어 해외에 이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진중공업이 필리핀 수빅에 거대한 조선소를 건설했으나 결국 실패한 것도 한국에서 모든 자재를 운송하는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한국, 일본의 조선업 경쟁은 사실 각국의 지역별로 구축된 클러스터간 경쟁이다.
이들 클러스터들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2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산업정책, 직업교육, 기술이전, 물류 인프라 등이 결합되어 태어나고 자라며 성숙했다.

많은 기업들이 지리적으로 밀집되어야 하는 조선 클러스터를 쉽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현대 컨테이너 물류 시스템으로 인해 글로벌 value chain이 막강해진 마당에, 시대착오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선박에 들어가는 철판과 기자재를 컨테이너에 담아서 보낼 수 없기 때문에 조선업은 글로벌 value chain의 개념과는 다르게 봐야 한다.
자동화 라인을 깐다고 배가 나오지 않으며, 수많은 작업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일을 하고 품질을 유지하며 공급망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손발이 맞아야 한다.
그래서 수많은 나라들이 조선업 육성을 위해 노력했지만, 극소수만이 성공한 것이다.

미국이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에게 자국 조선업의 부흥과 생산능력 증대를 위해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현지 조선소를 인수해서 생산 노하우를 전수하고 설계와 자재를 좀 도와주는 정도로 미국 정부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좋겠지만, 결국은 미국에 조선 클러스터를 만들어야만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한국에서 배을 지어 미국에 수출하려는게 우리의 숨은 속내라면 한국의 조선 클러스터를 미국으로 통째로 옮겨오는게 그들의 숨은 속내일 수 있다. 아마도 그 중간 어딘가에서 결론이 날듯 한데, 태평양을 건너가는 수많은 메가/기가/테라 블록들의 흐름을 조만간 볼지도 모를 일이다.